'버스킹 학점제'로 클래식 대중화 꿈꾼다…'거리의 성악가' 노희섭 [조재현의 조명]

조재현 기자 2023. 3. 3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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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곳곳서 흐르는 클래식…트로트 열풍 못지 않을 것"
"음악으로 사회적 아픔 치유하는 건 예술가 숙명"

[편집자주] 조명(照明). '광선으로 밝게 비추거나 무대의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 빛을 비춘다'는 의미입니다. 또 '어떤 대상을 일정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양한 빛' 아래 살아가고 있는 문화·예술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볼까 합니다. 묵묵히 제 몫을 하는 문화·예술인들 모두 조명받을 이유는 충분하니까요.

인터뷰에 앞서 노래하는 노희섭 성악가. 인터뷰는 그가 관장으로 있는 서울시 강서구 스카이아트홀에서 진행했다.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길에서 노래하는 이유요? 클래식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죠. 그런데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버스킹 학점제'입니다."

서울 중구 명동 거리를 무대로 삼은 성악가가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도, 첨단 음향 시스템도, 유료 관객도 없지만 1시간 이상 공연을 거뜬히 소화한다. 레퍼토리도 적절하다. 친숙한 오페라 아리아부터 이탈리아 칸초네, 가곡, 팝송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트로트를 불러달라는 요청에도 기꺼이 응한다. 어쩌다 한 번 열리는 이벤트성 공연도 아니다. 2013년 여름 시작한 거리 공연은 어느덧 1000회를 넘겼다. 클래식 음악 저변 확대를 위해 노래하는 '거리의 성악가' 노희섭(53)이다.

'거리의 성악가'로 알려진 성악가 노희섭이 지난 27일 서울 중구 명동 거리에서 노래하는 모습. (노희섭 제공)

평범하지 않은 그를 '조명'하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클래식 대중화의 지름길로 거리 공연 이상의 것을 주장하고 있어서다. 그는 전국 대학에서 성악이나 피아노, 관현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버스킹을 제안한다. 왜일까. 본인의 기량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클래식을 널리 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꼭 거리가 아니어도 좋다. 학교 인근의 공공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라고 독려한다. 다만, 필요한 게 있다. 학생들이 시간과 노력을 쏟는 만큼 학교는 이를 수업의 연장선으로 봐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이른바 '버스킹 학점제'의 골자다.

교수들을 중심으로 학교가 뜻을 모으면 가능한 일이라고 노희섭은 강조한다. 명분이 있다. 클래식 음악 전공자들엔 연주 무대가 소중하다. 해외 유학까지 다녀오더라도 안정적인 연주 무대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교내 정기 연주회라고 해 봤자 손에 꼽는다. 관객과 직접 호흡하며 그동안 배운 것을 체화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노희섭은 "10년 넘게 파고든 분야인데 내가 원할 때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건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성악가 노희섭.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넘어야 할 벽은 물론 있다. 학생들의 인식이다.

"거리로 나오라고 하면 고개를 저어요. '미쳤다'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동안 쏟아부은 게 있느니 눈높이는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으로만 가 있는 거예요. 거리는 본인이 설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생각의 방향만 조금 틀면 가능한 일이라고 노희섭은 말한다. 부정적인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학생이라는 신분을 십분 활용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회에 나오면 진짜 전쟁터잖아요. 내가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해서 기회가 절로 주어지는 건 아니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학생 때만 할 수 있는 게 있잖아요. 게다가 거리 공연을 통해 성적 관리도 하게 되고, 창피해할 이유도 전혀 없어요. 현장 경험을 학생 때부터 쌓다 보면 음악가로서 미래를 그리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성악가 노희섭.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노희섭은 이를 통해 클래식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깰 수 있다고 말한다. 특정 층만 향유하는 예술이란 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전국의 음대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면, 어디서든 쉽게 클래식 음악을 접할 수 있겠죠. 그러면 트로트가 큰 인기를 끌듯 우리나라가 클래식으로 들썩거릴 수 있지 않을까요."

노희섭이 거리로 나서게 된 것 역시 클래식 음악을 널리 퍼트리겠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처음부터 거리를 목표로 했던 건 아니다. 노희섭은 삼수 끝에 들어간 영남대 성악과를 졸업 후 1998년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의 문을 두드렸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수학한 것으로 유명한 학교다. 하지만 생활비 문제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웠고, 결국 부담이 적은 시에나 국립음악원으로 옮겨 석사 과정을 밟았다.

노희섭은 귀국 후인 2003년 세종문화회관 서울시오페라단에 들어갔다. 준공무원 대우를 받는 안정적인 자리였다. 10년 동안 굵직한 오페라 무대의 주역으로 활약했고, 직접 오페라도 제작하는 등 음악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던 시절이었다.

서울시오페라단 상임 단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노희섭. (노희섭 제공)
서울시오페라단 상임 단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노희섭. (노희섭 제공)

그런데 벽과 마주했다. 큰돈을 들여 무대에 올린 작품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자 경제적인 부담은 물론 자신감마저 떨어졌다.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무대가 점차 줄어든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했다. 이에 거리를 택했다. 비용 걱정도 없이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는 거리는 그에게 최고의 무대였다.

거리 공연을 시작한 지 10년 만인 지난해 가을엔 1000회를 넘겼다.

"사실 100회만 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처음엔 레퍼토리도 없었어요. 오페라 곡을 부를 MR(반주 음원)조차 구하기도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3~4곡을 계속 반복할 때도 있었죠. 관객들은 매번 바뀌니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웃음)

'거리에서 노래한다'는 이 짤막한 문장엔 상상 이상의 노력과 열정, 용기가 필요하다. 돈도 되지 않은 무료 공연인 데다, 더위나 추위도 이겨내야 한다. '즐기겠노라'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관객은 없을 때가 다반사다.

100회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 계산으로 매주 두 번씩 꼬박 1년을 해야 달성할 수 있는 수치다. 누군가는 동료들 체면을 깎아내리는 일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노래를 하면 목이 상할 것이란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노희섭은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무대를 개척했다. 그는 '출세한 음악가'라고 강조했다. "음악 하는 사람에게 무대가 있다는 건 축복과 같은 겁니다."

극장을 빼곡히 채운 관객들의 박수갈채나 환호성이 없는 무대에도 만족감은 있을까. 노희섭은 행인들의 작은 변화에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서 있거나 집중해서 듣지 않더라도 기분 좋고 행복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게 제 눈에는 보여요."

성악가 노희섭.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그런데 왜 클래식 대중화가 필요한 것일까. 그는 클래식에는 힘이 있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클래식은 정서적인 안정을 줘요. 불안하고 그럴 때면 찾게 되잖아요. 그런 음악을 누구나 다 쉽고 편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음악으로 세상의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는 신념도 그가 거리로 나서는 원동력이 된다.

"거리 공연을 하다 보면 세상의 모든 고난을 홀로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사람을 볼 때가 있어요. 여러 문제가 원인이겠죠. 그럼 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바꾸면 그런 분들도 숨 쉴 틈이 생기지 않을까요. 예술을 하는 사람에겐 그런 사회적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 27일 명동 거리로 다시 나섰다. 그의 1012번째 거리 공연이었다. 한 후원가가 유사시 무대로 쓰라며 기증한 트럭의 개조를 끝내자마자 다시 무대에 선 것이다. 차량 덕에 공연 장소는 다양해지고, 그가 목표로 하는 2000회 공연 달성 시기도 앞당겨질 전망이다. 이젠 '차 위의 성악가'가 된 게 아니냐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 번 거리의 성악가는 평생 거리의 성악가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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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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