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31.역사속으로 사라진 조양상선그룹

손건웅 2023. 3. 3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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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경제가 눈부신 성장을 할 때 많은 역할을 했으나 짧은 기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기업도 적지 않다. 기업이 무너지면 근로자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심한 경우에는 국민 경제가 타격을 받기도 한다. 그들의 쇠락과 해체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겠으나 풍수적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 풍객의 관점이다. 조양상선그룹의 선영을 소개합니다.

조양상선을 창업한 사람은 밀양 출신의 박남규이다. 1920년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회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14세 때 돈을 벌기 위하여 일본의 고베(神戸)로 갔다. 3년만에 상당한 돈을 벌어 귀국한 그는 운수(運輸)사업에 손을 대는데, 일본군이 쓰던 군용트럭을 버스로 개조하여 시작하였다. 이것이 조양상선의 모태가 되었다. 이 때 동생 박남수와 박남도도 참여한다. 박남규는 27세 때인 1946년에 천일정기화물을, 1947년는 천일여객을 설립하여 운수업체의 틀을 갖춘다. 천일여객은 나중에 천일고속으로 발전하는데, 이는 광주에서 운송업을 시작하여 금호그룹으로 성장시킨 박인천 회장과 비슷한 경우이다. 

박남규 회장 증조부 묘소. 밀양시 마흘리.

증조 묘소가 박남규 집안에 서광을 비추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시절이 어려운 조선 말기에 해당하지만 이 묘소의 풍수파워가 후손들이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핵심 명당의 여기(餘氣)에 해당하지만 14회절 명당이니, 지금의 기준으로 중소기업을 이끌어갈 역량의 혈처에 해당한다.

운수업으로 자금력이 생기자 1960년대에는 선박 2척으로 이안상선을 설립한다. 1963년 상호를 조양상선으로 바꾸고 한일항로를 확보하여 기반을 다졌다. 대한선주(한진해운의 전신)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외항선사(外航船社)로 급성장하며 5대양 6대주로 수출물량을 실어날랐다. 조양상선은 극동 유럽간 정기항로와 호주항로까지 개척하면서 독점적 운항을 했고, 1981년에는 지중해 항로까지 개척하여 세계 주요지역을 운항하는 선사(船社)가 되었다. 또한 외항해운 운임수입 1억달러 탑을 수상하는 영예도 안았다.

 박남규 회장 조부모 묘소. 조부 묘소 뒤로는 증조부의 묘소가 보인다.

조부모 묘소 맥로도. 수려한 조안산은 운무(雲霧)에 가려있지만 이곳으로 진진입하는 맥로는 조안산을 넘어온 것이 확실하다.

조부 묘소가 박남규 3형제의 사업에 결정적인 추동력을 주었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기업인의 선영이 20회절 이상의 명당에 자리하면 대기업의 추동이 가능한데 이곳은 25회절 명당이기 때문이다. 조부모 두 분을 하나의 봉분에 모신 것도 풍수파워를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다.

조양상선이 순항(順航)하자 박남규는 사업 다각화에 나선다.

1973년 제일생명을 인수하면서 재벌그룹 반열에 진입했음을 세상에 알린다. 제일생명은 지금의 서초동 교보타워 자리에 16층 사옥을 지어 랜드마크 빌딩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 때 박남규는 천일여객 창업 때부터 사업을 도왔던 큰 동생 박남수에게는 천일여객을, 작은 동생 박남도에게는 천일정기화물의 경영을 맡긴다. 훗날 조양상선이 도산했을 때도 천일여객 그룹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이러한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남규 회장 부모님 묘소.

조양상선의 좌초는 이 묘소에 기인한다. 부친 20회절, 모친 21회절 흉에 걸렸으니, 대기업을 추동할 풍수파워에 상응하는 흉지에 모셨다. 회사가 파산하기 전에 장손이 세상을 떠난 것도 이 묘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980년대 해운합리화 조치로 해운회사들이 통폐합되는 등의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도 조양상선은 내실을 다지는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리고 박남규는 1989년 장남인 박재익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의 물동량이 급증했고 이에 따라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은 모기업(母企業)의 지원으로 선대(船隊) 재편 작업에 돌입한다. 그러나 조양상선은 다른 계열사를 인수·운영하느라 자금의 여력이 부족했다. 서비스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물동량 유치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세계일주(RTW)서비스 동맹에 3,000억을 투자했으나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유동성 위기만 키웠다는 평가이다.

게다가 1992년에 발생한 정보사 땅 사기사건이 발생하는데, 제일생명은 사기단의 말을 믿고 660억을 건넸는데 이것이 사기로 밝혀졌다. 박남규도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수모를 당하면서 조양상선의 이미지는 크게 타격을 받는다.  

 박재익 부회장(1945~1997년)묘소. 부친 하단.

연세대 경제과를 졸업한 후 조양상선에 입사하여 부친을 보좌하며 사세확장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조양상선그룹 부회장과 한국선주협회장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나 병마로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상단 부모님, 중간 박남규, 하단 박재익 묘소.

3대가 모두 맥로에 걸린 흉지에 모셨다. 흉이 기운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강도가 세어진다.

박남수(1924~2015년) 회장 묘소. 필자가 2014년에 간산했을 때도 묘소는 조성되어 있었다.

형인 박남규와 함께 천일여객을 설립했고, 천일고속 등을 세웠다. 운수여객 발전과 사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과 봉황장을 수상했다.

이 묘소 또한 위로 진행하는 맥로에 모셨다.

박남도 (1929~2013년) 회장 묘소.

1956년 천일정기화물 자동차 주식회사 창립을 비롯하여 5개 계열사를 운영하였다. 십년 무교환 부동액을 개발하여 특허권을 취득하기도 했다.

이 묘소 또한 큰 형 박남규 묘소와 대등한 흉에 걸렸다.

이곳의 비문(碑文)에 새긴 풍수적 내용만 옮기면 아래와 같다.

남도의 등뼈인 화악(華岳)과 덕대산 사이에 자리한 어의봉의 한 모퉁이에 청도천의 푸른 물줄기를 앞에 두르고 푸르고 넓은 들판을 거느린 천고의 명당자리이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위성지도에 표시한 맥로도.

박남규 회장 기준 1.증조부 2.조부모 3.부모 4.박남규 5.박남수 6.박남도 7.박재익.

묘역의 주혈에는 조부모(2) 묘소가 자리하니 조양상선그룹의 창립과 발전을 추동해 준 핵심 명당이다. 증조부(1) 또한 명당에 자리하니 주마가편(走馬加鞭) 격의 풍수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타의 묘소들은 모두 맥로에 걸린 흉지에 모셨다. 특히, 부모묘(3)는 장손의 타계와 그룹의 파산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창업회장 세대의 후손들은 여전히 살아남은 기업을 운영하면서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수적 고려가 선결 과제라는 것이 풍객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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