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을 가다①] 美·대만과 뭉쳐야 산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 부활의 상징, 구마모토 TSMC 공장
● 모든 게 느린 日서 반도체는 속전속결
● 민간 아닌 정부 주도로 美·대만과 뭉쳐
● ‘메이드인 재팬’ 위해 뭉친 드림팀
● 굴욕적인 기술 조건도 받아들인다
● 반도체 없으면 日 살아남을 수 없다
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미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 산업 질서를 재구축하고 게임의 룰(rule)을 바꾸려 한다. 동맹국에 보조금 당근을 내밀며 기술과 이익 공유까지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패권국 지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으로 외국 기업 공장을 유치하고 무엇보다 미국·대만과 똘똘 뭉쳐 협업 체계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과연 그들만큼 절박하게 뛰고 있는가. 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의 목소리를 전문가 인터뷰를 중심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美·대만과 뭉쳐야 산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② 기술·인재 다 없어졌지만 日이 반도체 부활에 절박한 이유
③ 영원한 1등은 없다, 日 반도체 추락사(史)가 주는 교훈
④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기자는 2015년 '일본 속에 남아 있는 한국의 고대 흔적'을 취재하면서 규슈 일대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규슈의 중심인 구마모토에서는 일찍이 공주 무령왕릉이나 익산 입점리 백제고분 것들과 매우 유사한 유물이 대량 발견됐다. 망명한 백제 귀족들의 기술로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기쿠치성(城)에서도 백제 불상이 발견(2008)돼 일본 사회를 흥분시킨 적이 있다.
겨울 추위가 한창이던 2023년 2월 7일, 후쿠오카 하타카 기차역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신칸센을 타고 40여 분을 달리는 동안 기자는 구마모토라는 지명의 한자 이름인 '웅본(熊本)'을 곱씹어 보았다. '곰 웅(熊)'자는 백제의 옛 수도 웅진(熊津·공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옛날 백제인들이 '웅진의 뿌리'란 뜻의 이름을 만든 건 아니었을까.
이번에 다시 구마모토를 찾은 까닭은 '반도체 취재' 때문이었다. 일본의 평범한 대도시인 이곳은 최근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년 전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칩 위탁생산) 업체 TSMC가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공장 건설 현장을 직접 가보고 싶었다.
신칸센 구마모토 역에 내려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하라미즈 역에 하차해 버스로 갈아타는 일정이었다. 버스 종점 이름은 '소니 세미컨덕트'. TSMC가 공장을 짓고 있는 일대가 소니 등 반도체 부품 공장이 밀집한 곳이라는 것을 짐작게 하는 이름이었다.
하라미즈 역에 내린 시간은 오전 8시. 시골 간이역처럼 허름했지만 직장인들로 보이는 100여 명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만원 버스를 타고 30여 분 뒤 종점 역에 도착하니 드넓은 대지 위에 대규모 공장이 흩어져 있어 거대한 산업단지를 연상케 했다.
TSMC 공장 건설 현장은 종점 역에서 10여 분을 걸어가야 했지만 워낙 커서 멀리서도 금방 눈에 들어왔다. 총 21만㎡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약 2m 높이의 가벽으로 둘러싸인 현장에선 수십 대의 크레인, 굴착기, 대형 트럭 등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24시간 가동된다는 현장 주변은 가림막이 쳐져 있었지만 공사 현장의 기계음과 사람들 발걸음으로 분주했다.
모든 것이 속전속결
구마모토는 일본이 반도체 패권국이던 1980년대 관련 산업을 이끌어온 중심 도시였다. 일찍이 1960년대부터 NEC와 미쓰비시 반도체 공장이 세워졌고 잇달아 소니 세미컨덕터 솔루션스 공장과 도쿄일렉트론 공장이 세워졌다. 규슈 일대는 한때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10%를 차지해 '실리콘 아일랜드'로 불렸지만 일본 반도체가 몰락하면서 지역경제도 몰락하기 시작했다. 구마모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전격적으로 TSMC 공장이 들어서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지금 일본은 정부를 중심으로 1980년대 반도체 영광을 되찾자는 목소리가 크다. 구마모토야말로 반도체 부활의 상징적 현장인 셈이다.
시간을 3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짓는다는 기사가 언론에 오르내리던 시기는 2020년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TSMC는 기사 내용을 부인했지만 경제산업성이 2021년 6월 4일 TSMC 유치를 공식 선언하면서 기정사실이 됐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약속이나 한 듯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경제산업성 발표 4개월 만인 2021년 10월 TSMC는 공식적으로 일본 내 파운드리 진출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장이 세워지는 곳은 '구마모토현'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공장 건설비용의 40% 수준인 4760억 엔(약 4조550억 원)을 보조금으로 지급하겠다고 했다.
구마모토 TSMC 공장에서 칩이 양산되는 시점은 내년인 2024년 12월이다. 웨이퍼의 경우 12인치 월 5만5000장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한다. 속도보다는 안전을 중시해 모든 것이 느리고 신중한 일본에서 3~4년 걸리는 반도체 공장 건설을 2년 만에 끝내고, 3년 내에 제품을 생산하겠다는 자체가 이례적이다.
현재 일본의 반도체 칩 공정 기술은 40나노(1㎚는 10억분의 1m)까지 구현됐다. 구마모토 공장에서 나오는 칩은 28~22나노 기술로 만들어진다. 현재 삼성전자와 TSMC가 3나노 칩을 양산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갈 길이 멀고도 멀다. 하지만 구마모토발(發) 훈풍은 일본 반도체 산업계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구마모토 TSMC 공장의 파급효과를 돈으로 계산하면 향후 10년간 약 4조3000억 엔(41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공장 건설에 시큰둥했던 사람들도 막상 양산 시점이 다가오자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주변 땅값은 오르고 있고 재료나 장비 회사들도 서서히 공장 주변에 모일 태세다.
실제로 TSMC 진출 이후 20개가 넘는 일본 소재 장비 기업들이 이곳에 기존 시설의 증강이나 신규 진출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업체가 소니(Sony)다. 소니 그룹은 구마모토현에 진출한 TSMC 새 공장 인근에 2024년 스마트폰용 이미지센서 공장을 착공하고 2025년 이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소니는 이미지 센서(CMOS) 시장에서 세계시장 점유율을 40%가량 차지하고 있는 글로벌 1위 기업이다. 이미 구마모토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소니는 TSMC의 구마모토 공장이 돌아가면 여기서 로직 반도체를 공급받아 이미지센서 생산에 활용하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최근 수요가 늘고 있는 스마트폰용 이미지 센서를 '메이드인 재팬'으로 만들어 차세대 이미지센서 시장에서 2위인 삼성전자를 포함한 여타 기업들과의 격차를 벌리겠다는 전략이다.
사람도 기술도 부족한 일본 반도체산업이 부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우선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일본의 경우 철저하게 정부가 나서서 미국, 대만과 협업 체계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주도 미국·대만과 협업
구마모토에서 TSMC 공장이 첫 삽을 뜨고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2022년. 경제산업성은 첨단 반도체 기술개발을 위한 미국과의 협업 프로젝트를 잇달아 발표했다. 5월 하이우다 고이치 당시 경제산업성 장관과 지나 레이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미일 정상 합의에 근거한 것"이라며 "양국 간 반도체 공급망에 협력하고 시장을 투명하게 개방하며 쌍방이 인정하고 보완하는 형태로 반도체 제조 능력 강화, 노동력 개발 촉진, 투명성 향상, 반도체 부족에 대한 긴급 대응 협조 및 연구개발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당시 발표된 협력 방안에서 가장 눈길을 끈 점은, 두 나라가 향후 반도체 칩 패러다임을 바꿀 '2나노' 칩 양산을 위해 손을 잡겠다고 한 것이었다. 2나노는 그야말로 칩 미세화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첨단 중에서 첨단 기술이다.
미일 양국은 협력 방안을 발표한 지 불과 두 달 만인 7월이 되자 공동연구 개발 조직인 '기술연구조합 최첨단 반도체기술센터(LSTC)'를 2023년 내에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11월이 되자 2나노 칩을 생산할 회사로 '라피더스'를 세웠다며 8월에 이미 설립 등록까지 마쳤다고 발표했다.
LSTC 설립 논의는 3년 전인 2020년부터 물밑에서 이루어졌다는 후문이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정재계 인사가 막후에서 수시로 만나 긴밀히 소통했는지 미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이번 행사에는 전년 대비 50%가 증가한 673개 업체가 참여했다. 원래 참여를 희망하던 업체는 700개 사가 넘었다고 한다. 올해에는 더 규모를 키우겠다는 것이 행사 관계자의 전언. 이번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피더스에 의한, 라피더스를 위한 것'이었다는 게 도쿄에서 만난 참석자들의 평가다.
‘2나노를 넘어(Beyond 2nano)'
첫날에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일본 반도체산업을 왜 부흥시켜야 하는지를 주제로 개막 연설(Opening Speech)을 해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면서 라피더스를 '미래 차세대 반도체 양산 거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민당 반도체 전략추진의원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아마리 아키라 의원은 "왜 지금, 일본이 첨단 반도체를 하려 하는가, 대만해협이 봉쇄되면 최첨단 로직 반도체 공급이 70~80% 멈춘다. 중국과는 연계할 수 없다. 기업과 정부 레벨에서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미국·유럽과 제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같은 날 저녁 열린 만찬장에는 일본의 주요 장비 재료 업체들의 주요 경영 간부(회장 및 사장급)들은 물론 반도체 관련 정재계, 학계 관계자 등 400명이 모였다. 행사에 참여한 업계 관계자는 "이들이 한꺼번에 만찬 자리에 총출동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경제산업성이 참석을 독려했다는 뒷이야기도 있었다"고 전했다.
‘라피더스'의 영어표기 'Rapidus'는 라틴어로 '빠르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치면 회사 이름을 '빨리빨리'로 지은 것이다. 그만큼 절박감과 의욕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피더스는 정부가 주도하지만 일본 대표 기업들이 출연금을 낸 민관합동 기업이다.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가히 드림팀이라 할 만하다. 세계 15위권인 일본의 유일한 반도체 제조회사이자 낸드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2위권인 키옥시아를 비롯해 도요타, 소니,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이 참여했다. 회사의 초기 실탄(자본금)은 8개 기업이 각각 낸 출자금 73억4600만 엔(약 702억5000만 원)에 정부 지원금 700억 엔(약 6650억 원)이 투입됐다.
회장으로 영입된 히가시 데쓰로는 반도체 공정 분야의 슈퍼급 엔지니어로 세계적 첨단 제조장치 기업인 도쿄일렉트론 사장도 지냈으며 정재계에 두터운 인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라피더스는 '2나노를 넘어(Beyond 2 nano)'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첫 시제품이 나오는 시기를 2027년으로 잡았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삼성도 TSMC도 하지 못하고 있는 2나노를 하겠다니 꿈도 야무지다"는 냉소적인 여론도 많다. 덧붙여 "2027년쯤 되면 삼성, TSMC 모두 2나노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라피더스가 해낸다 해도 늦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라피더스 경영진은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2나노칩 공장 부지도 일본 북부 홋카이도 중심도시 삿포로에서 가까운 치토세에 세울 것으로 알려졌다. 고이케 아쓰요시 사장은 "물과 전기 등 인프라가 안정적이고 국내외 인재들이 모이기 쉬운 곳에 공장에 세울 것"이라면서 "최첨단 반도체를 맞춤형으로 신속하게 공급하는 고수익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하면 삼성과 TSMC 등과 차별화할 수 있다"고 했다.
IBM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은 일본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IBM은 2021년 2나노 반도체 시제품 생산에 성공한 회사다. 라피더스와 IBM 경영진은 새해 벽두인 1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미·일 정부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2나노 첨단 반도체를 공동 연구·개발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라피더스가 IBM에 직원을 파견하고 필요한 기초 기술의 숙련을 진행시킨다는 계획이다. 고이케 사장은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IBM으로부터 기술 공여가 없으면 일본과 세계적인 기술 격차를 메울 수 없다"고 했다.
또 라피더스가 지난해 12월 6일 기술협력을 추진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IMEC은 현재 반도체 기술에 관한 한 세계 최대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유럽, 아시아, 북미 전역 7개 지역에 연구소를 두고 있으며 100여 개 국가에서 온 수천 명의 연구진이 반도체 기술을 연구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6월 본부가 있는 벨기에를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IBM, IMEC과의 협업은 40나노를 건너뛰어 2나노로 가겠다는 일본 정부의 구상이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단지 '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현지에서는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기술을 얻고자 굴욕도 마다 않는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부활의 또 다른 우군은 대만이다. 현장에서 느낀 일본과 대만 사이의 반도체 협력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했지만 친일(親日) 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는 국가다. 실제로 대만에 가보면 일제 식민지 시절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대만과 일본의 우호적 관계는 반도체 패권전쟁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글로벌 파운드리 최고 기업 TSMC는 구마모토 공장에 이어 지난해 6월 도쿄도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공동 연구하는 연구개발센터를 세웠다. 기술이전에 극도로 인색한 TSMC가 다른 나라에 연구센터를 만든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 웨이저자(魏哲家) 최고경영자(CEO)는 개소식에서 "일본과 대만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며 "이 연구소에서 맺는 협력관계가 더 많은 혁신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날 개소식에서는 일본과 대만의 인적 관계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TSMC와의 산학협력을 이끌고 있는 구로다 다다히로 도쿄대 교수의 연설이었다. 행사에 참석한 일본 반도체 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구로다 교수는 과거 일본이 대만의 한 시골 마을에 홍수와 가뭄을 대비하기 위해 댐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댐으로 마을이 비옥해지고 지금은 대만의 대표 곡창 지대가 됐다는 거였습니다. 대만 관계자들은 이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구로다 교수는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대만 회사인 TSMC가 일본에 와서 첨단 패키지 연구센터의 기공식을 한다는 것이 정말 감개무량한 일'이라면서 '과거 농업의 근간이던 댐 건설만큼이나 디지털/AI(인공지능) 사회의 핵심인 반도체 관련 연구개발 시설이 일본에 들어서는 것이다. 일본은 은혜를 중시하는 나라다. 대만도 마찬가지라면서 긴 역사를 함께한 일본 대만 두 나라가 이제 반도체로 이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만과 일본의 참석자 중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190억 엔을 지원하는 연구소에서는 반도체 후공정(웨이퍼를 절단해 제품화)에 강점을 가진 일본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등과의 공동 연구가 추진된다. 지금까지 반도체 업계의 기술 진화는 칩을 얼마나 작게 만드느냐는 미세화가 관건이었지만 요즘은 후공정 기술도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칩이 분자보다 작은 10나노 크기가 되면서 이를 제품화하는 후공정 기술이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소재 장비 기업들은 후공정 분야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인텔, TSMC, 삼성전자 등은 칩 패키징 기술의 강자인 일본의 레조낙, 신코, 이비덴, 아지노모토, 디스코, 어드반테스트, JSR, TOK 같은 소부장 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없다면 아무리 첨단 반도체칩 제조기술을 갖고 있다 해도 칩을 만들 수가 없다. 그런데 이들 소부장 기업들이 TSMC와 연구·개발(R&D) 단계에서부터 협력한다면 큰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일본 정부는 연구센터를 열면서 굴욕에 가까운 조건에도 합의했다는 후문이다. 일본 정부 돈으로 일본의 첨단 장비를 활용해 일본의 기업들과 공동 연구 개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만이 이 기술을 대만으로 가져가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경우 일본 정부가 제동을 걸 수 없다는 것이다. 한 한국 소재 장비 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쓰쿠바 연구센터에는 일본인 직원들이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공장 출입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이 TSMC에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새로운 기술 개발을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콧대 높은 일본이 이렇게까지 연구소 유치를 한다는 게 우리로서는 매우 긴장되는 대목입니다."
미국이 엔低 용인하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부활 프로젝트에 시장은 어떤 분석을 내놓고 있을까. 기자는 오랜 기간 반도체 분야를 맡아온 애널리스트 및 업계 관계자들을 도쿄 현지에서 다양하게 만나봤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시선은 극단적으로 긍정론과 부정론이 엇갈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선 긍정론의 대표 주자 두 사람을 만났다.도쿄와 홍콩·대만의 가트너, IDC재팬, HIS, 옴디아 등 주요 시장조사업체에서 일했으며 현재 일본 특허청의 반도체 관련 특허 심사위원이자 국책연구기관인 신에너지 산업기술총합개발기구(NEDO)의 연구과제 평가위원이기도 하다. 일본 혁신 기업들에 대한 예산 지원을 심사하는 반관(半官) 성격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분히 친(親)정부 성향을 가진 인물로 볼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일본 정부의 계획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란 이야기도 된다.
그를 만난 건 도쿄 아키하바라의 한 빌딩 강연회장에서였다. 테크놀로지 전문매체 산교타임스 주최로 열린 '반도체의 미래, 어떻게 될까'라는 그의 강연에는 기업 관계자 등 250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그와 자리에 앉자마자 라피더스 설립을 어떻게 보는지부터 물었다. 그는 "한마디로 미·중 갈등에 따른 전체적인 큰 그림에서 봐야 한다"며 이렇게 운을 뗐다.
"미국 상무성이 2022년 10월 새롭게 중국 대책을 발표했다. 미국 기업들이 중국 비즈니스를 줄이는 대신 인도·동남아시아로 옮기겠다고 했다. 미디어는 보도하지 않고 있는데 실제로 미·중 간 비즈니스 규모는 줄고 있다. 애플만 해도 중국 스마트폰 제조 공장을 지속적으로 다른 나라로 이전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일본을 반도체 최대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세계시장에서 반도체 장비는 35%, 재료(소재)는 55%의 점유율을 갖고 있다. 미국은 이를 더 늘리겠다는 생각이다.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 구축과 2나노칩 양산을 위해 라피더스를 생산 거점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IBM과 2나노 이하 칩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것은 그래서 큰 의미가 있다. 일본의 강점을 더욱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협력하려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최근 엔저를 '서포트'하고 있는 미국 입장을 주목해 봐야 한다"고 했다.
서포트? 미국이 엔저를 용인하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 사실 긴 시간 동안 지속된 엔고로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낮아져 왔다. 그러다가 2014년부터 평탄하게 엔저가 되면서 완만한 성장이 가속을 받는 모습이다. 달러당 130엔을 장기간 유지한다면 일본 제조업은 완전히 부활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본 정부와 일본 은행의 전략이며, 이를 미국이 서포트하고 있다고 본다. 일본 정부는 제조업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특히 반도체를 키우려 하는데 미국이 이를 유도하고 있다."
그의 말은 미·중 패권 싸움에서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주목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환율 문제는 복잡해 보인다. 우선 일본 내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 대해 묻고 싶다. 라피더스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라피더스 자체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다기보다 일단 기업을 만들어놓아야 엔지니어를 모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IBM, IMEC과의 협업으로 일본 엔지니어들이 최첨단 기술을 배우고 시스템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라피더스 설립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인재를 키울 장소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히가시 회장이나 고이케 사장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은 당장의 현실을 생각하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지만 중요한 건 일본이 뭔가를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는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진행된다는 거다."
미·중 갈등으로 우리가 큰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이건 외부 요소다. 바깥 상황이란 언제나 변하는 것 아닌가. 공장 설립에 한두 푼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 반도체산업에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예산을 투입할 수 있을까.
"지금 일본 정부는 반도체 기술이 없으면 국가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 정세가 변하더라도 반도체 육성을 지속할 것이다. 라피더스가 당장 일본 반도체를 살리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나는 2022년부터 고이케 사장과 다양한 논의를 해왔다. 처음에는 제품 양산이 아니라 연구개발(R&D)만 할 것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앞으로 반도체 수요는 점점 늘어날 것이므로 생산 공장이 꼭 필요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 공장이 없다면 인재 육성도 할 수 없고 소재 장비 업체와의 협력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미국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데, 혹시 1980년대 일본 반도체를 굴복시킨 미일 반도체 협정의 트라우마 때문은 아닌가.
"미국의 힘은 강하다. 전 세계 유일한 기축통화가 달러라는 점만 봐도 그렇다. 지금도 달러 가치만 올라가고 있지 않은가. 강(强)달러로 돈이 미국으로만 몰리고 있다. 미국의 힘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고 계속 그럴 것이다. GAFA(가파, 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가 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하고 있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있다. 새로운 싸움의 형식, 장소 즉 전장(戰場)을 만들려 한다는 말이다. 미국에는 이를 이끌어갈 힘, 즉 사람과 상상력이 있다. 일본의 반도체산업은 이런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이다. 나는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다."
반도체 시장 2024년부터 급성장할 것
GAFA는 어떻게 전장을 바꾸려 하는가."광고나 구독을 통한 유료 회원으로 돈을 벌었는데 매출이 정체되고 있다. 앞으로는 2차원이 아닌 3차원 즉 메타버스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플랫폼 빅체인지가 일어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강력한 프로세싱 파워, 이를 백업할 로직·메모리 등 반도체칩은 더 필요해진다. 데이터센터도 필요하다. 2024년부터는 데이터센터 투자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지금은 시장이 어렵지만 적어도 내년부터는 급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스마트폰, 컴퓨터, TV 등 개인이 소비하는 제품이 반도체 시장을 견인했다. 앞으로는 DX(Digital Transformation), GX(Green Transformation, 탈탄소) 등 정부가 투자를 이끌 거다. 이것이 매우 큰 반도체 수요를 불러올 것으로 본다."
미·중 마찰은 언제까지 간다고 보나.
"10년 정도 지속되리라 본다. 미국이 과거에 일본을 10년 이상 괴롭혔다.(미일 반도체 협정) 미국은 상대 힘을 완전히 빼놓을 때까지 간다. 중국이 요즘 유화 제스처를 보이고 있지만 미국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너무 강해져서 미국에 위협이 된다. 미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30년 전 일본도 매우 강했다. 그런데 결국 미국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 사람들은 당시 미국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굴욕의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국 이야기를 해보자. 일부에서는 한국이 미·중 갈등으로 중국의 첨단 제조 기술개발 속도를 늦추게 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중 갈등이 지속된다면 일본도 그런 점에서 이익을 얻는 면도 있지 않을까.
"중국은 아마 미국의 방해로 최첨단 D램은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중국의 재료 장비 회사들이 약진해 관련 업체들이 위기감을 느꼈지만 미·중 갈등으로 중국의 개발 속도가 떨어져 이 역시 이익을 볼 것이다. 한국으로서도 시간을 번 게 맞다."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도 중국에 반도체 공장들이 있다. 미중 갈등이 장기화하면 중국 시장에서 발을 빼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현 상황에서 계속 유지할지 아니면 팔고 나올지는 전적으로 해당 회사의 경영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으로서도 중국 비즈니스가 중요하니까 폐쇄나 매각보다는 현상 유지 쪽으로 가지 않을까? 중국도 (한국의 회사들이) 생산을 멈추면 해당 회사들에 강경하게 경고할 수 있으니 섣불리 행동하게 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일본과 대만과 사이의 협력도 긴밀해 보인다.
"그렇다. 대만과의 관계는 매우 좋다. 양국이 국교는 없지만 인적 교류는 많다. 앞으로 글로벌 파운드리 3위 업체인 UMC나 다른 회사들도 일본에 연구소나 설계 센터를 개설하는 등 일본 진출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기업들과의 협업은?
"일본으로서는 웰컴이다. 지금 일본에는 반도체 인재와 마케팅이 부족한데, 이를 한국 기업들이 도와주면 좋겠다."
장기적으로 인도 시장을 눈여겨보자는 여론이 많던데.
"그것도 미국이 관여하는 일인데 중국 시장이 없어지면서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키우려 하고 있다. 인도도 반도체를 자국에서 하고 싶어 한다. 타타나 베단타 같은 대기업들이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며 일본에서 장비, 재료 업체들에 부탁하러 오기도 했다. 인도는 아직 반도체 생태계가 조성돼 있지 않다. 엔지니어도 없고, 전력이나 인프라도 갖춰져 있지 않다. 하지만 정부도 기업도 열심히 하고 있다. 2027년에서 2029년 사이에 반도체 공장이 한 개 정도는 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 28~40 나노 로직 반도체가 될 것이다."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차분하고 조용한 인상과는 달리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일본 반도체 부활과 관련해 첫 질문을 던지자 "확실히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르다"고 했다.
일본의 반도체 부활을 보는 눈이 긍정적 시선과 부정적 시선이 엇갈리고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보나.
"나는 긍정적이다. 라피더스가 정부 투자금 700억 엔을 갖고 2나노를 하겠다고 하는데 '웃기지 마라'는 여론이 높다는 것을 경영진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현장에서 일했던 많은 브레인과 함께 해결책을 찾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이케 사장이 그리는 전략은 초특급 라인을 만든다는 것이다. 현재 반도체 공장들이 설계부터 양산까지 60일 걸리는데 초특급 고속라인은 5일에서 일주일 정도를 목표로 한다. 라피더스가 시제품 파일럿 라인을 만들고 일반 양산 라인은 TSMC가 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라피더스의 전략은 미국과 TSMC의 협업이지 삼성이나 TSMC와의 경쟁이 아니다. 라피더스는 비메모리여서 종류가 엄청 많을 것이다. 정부 지원도 700억 엔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반도체 기업들과 자본 제휴를 한다든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부활 조치는 너무 늦었다. 이미 반도체는 성숙 단계이므로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가 미국이 하니까 따라 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독자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이런 정신 상태는 메이지 유신 이후 변함이 없다.
어떻든 구마모토 TSMC 공장에 1조 엔을 투자하는 것도 처음엔 다들 비판적이었지만 지금 그런 여론은 사라졌다. 구마모토현 GRDP(지역내총생산)가 6조 엔인데 TSMC 구마모토 공장 유발효과는 1조 엔 정도 되리라 본다. 신규 반도체 공장이 들어선다는 건 엄청난 의미가 있다."
미·중 갈등은 어떻게 보나
"요즘 중국이 화해 제스처를 하지만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봉쇄는 계속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 알겠지만 서플라이 체인(Supply Chain)이 불안정해지는 시대다. 종래 세계화가 없어지고 각자도생하는 시대가 된 거다. 미국은 반도체 자급률을 현 시점에서 10% 정도 올리는 것이 목표다."
그럼에도 일본은 의지가 있다고 보나.
"일본 정부는 지난 몇 년 동안 독자적으로 무슨 일을 벌이는 데 자신을 잃었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면 국민도 설득이 되고, 미국 따라 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국내에서 '하자'라는 분위기가 있다. 반도체 관련 사람들이 '드디어 이제 겨우 우리 시대가 오는군'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 1인당 GDP도 대만·한국에 떨어지고 있으니 위기감이 크다. 의지는 불타고 있다."
한국에 대해 조언한다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도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 SK가 4분기 적자인데 한 번 더 적자가 나면 기술적으로 어렵다. 삼성은 수차례에 걸쳐 위기가 있었다. 로직이나 시스템 반도체를 아직 못하고 있는데 그만큼 IT(정보기술) 산업은 변화가 많다. 미국·일본도 마찬가지다. 인텔도 세계 최강이었을 때 안주하지 않았나. 이제 따라오려 하고 있다. 이 업계는 안주할 수 없다."
올해 메모리반도체 시황을 어떻게 보나.
"반도체는 올림픽 사이클이라고 해서 4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엇갈린다. 지금은 매크로 경제가 안 좋아 당장 하반기는 어렵다. 2024년은 돼야 회복한다고 생각한다."
반도체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강점과 약점을 꼽는다면.
"내가 제일로 꼽는 한국의 강점은 사람들이 머리가 좋은데 공부까지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웃음). 이런 점을 일본은 절대 못 이긴다고 생각한다."
소부장 사태로 인해 일본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불신이 높은가.
"나는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를 굉장히 반대했다. 일본 업체들이 타격을 받는 조치다. 수출을 규제하면 한국이 국산화를 하거나 해외 거래처를 찾을 텐데 왜 일부러 그런 반일을 만드나. 하지만 이런 현장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
미래 반도체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고속 메모리다. 반도체는 많이 부족할 것이다. 우상향하며 성장해 나갈 수밖에 없다. 메타버스에 100명이 동시에 접속하려면 엄청난 고속의 컴퓨팅 능력이 필요하다. 아직도 그런 기술에 도달하지 않았다."
[이건희 반도체 전쟁] 3고(高) 경제 위기 시대, '이건희 리더십'을 읽어야 하는 이유
도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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