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의 산 이야기] 노르딕 스키 타러 30년 만의 눈폭탄 속으로

신영철 2023. 3. 30.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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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네바다산맥
재미한인산악회 이스턴 시에라산맥 맘모스시 2박 3일
제설차가 기차 레일처럼 잘 다듬어 놓은 눈길은 노르딕 스키를 즐기기에 최적의 조건이 된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이 눈폭탄을 맞았다. 적설량을 가늠하는 스노팩Snowpack이 30여 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능선에 쌓인 눈 더미 두께가 2m를 훌쩍 넘어섰다는 수자원국의 발표. 북미 대륙의 태평양 쪽 척추에 해당하는 게 시에라네바다산맥이다. 600여 km 산줄기에 2m가 넘게 쌓인 눈은 축복처럼 고마운 일이다. 만년 가뭄에 시달리며 목말라 하는 캘리포니아의 젖줄로 기능하니까.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자는 재미산악회 제안을 받았다. 산맥 동쪽에 자리한 산간도시 맘모스시市에 가자는 말. 그곳에는 산악인 김명준씨가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 "꼰대 정신 보여 줬지"라고 조선일보 전면 기사에 등장했던 인물이다. 7대륙 최고봉 등정과, 7대륙을 넘어 보너스로 북극 마라톤까지 뛴 건각의 산악인.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통나무집 지붕만 살짝 보인다.

재미산악회 회원들과 만나 카풀을 한 차량들은 US하이웨이 395번을 타고 달렸다. 395번 도로는 모하비사막의 일부를 횡단하며 시에라산맥 동쪽을 달린다. 슬그머니 일어 선 산줄기가 툭툭 불거져 솟기 시작하더니 금세 고산준령으로 바뀌었다. 산줄기 마루금에는 눈처마를 하얗게 이고 있다.

산맥을 넘지 못하는 395번 도로는 산들과 함께 북진하고 있는 중. 산맥의 동쪽이므로 이 일대를 '이스턴 시에라'라고 부른다. 롱파인을 지나며 미국 본토 최고봉 휘트니산Mount Whitney(4,421m)이 반긴다. 캘리포니아 포티너스Fourteeners라는 말이 있다. 히말라야 14좌처럼 해발 4,200m(14,000피트)가 넘는 14개봉을 가리키는 단어.

해발 3,370m쯤 되는 맘모스산 정상의 스노보더들. 뒤로 보이는 능선이 요세미티국립공원이다.

그중에 무려 13개 봉우리가 맘모스시로 가는 395번 도로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화이트 마운틴만 오른편에 있고, 휘트니를 포함한 12봉우리는 왼쪽인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있다. 비숍Bishop이라는 도시를 지나며 고도가 급하게 올라간다. 이제 영화 겨울동화처럼 시나브로 하얀 세상이 시작되었다. 화이트 마운틴산맥과 시에라산맥은 온통 눈이 점령했다. 눈부신 설경이 과연 '눈 폭탄'이라는 과장된 기사를 실감시킨다.

제설하며 생긴 설벽이 도로 양쪽으로 키 높이로 서있다. 쉬어가며 6시간 남짓 달린 끝에 드디어 맘모스시로 들어서는 갈림길을 만난다. 계속 50km쯤 북행한다면 산악인들의 꿈, 요세미티국립공원 동쪽 입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맘모스시로 진입하면서 눈 때문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야말로 눈천지 설국이 이런 모습이라는 걸 보여 주고 있다. 맘모스시는 거대한 산맥인 시에라에서 중간쯤에 자리한다. 산간도시답게 이곳 해발고도는 백두산 높이쯤 되는 2,500m에 이른다. 제설 작업을 기가 막히게 해 놓았다. 설벽 사이 낸 길이 마치 미로처럼 보인다.

평소 물이 찰랑대던 마리호수가 눈밭으로 바뀌었다. 뒤편 송곳바위는 암벽등반가들의 클라이밍 겔렌더(등반 연습장)로 통용되는 곳이다.

도착한 별장 지붕엔 엄청난 눈이 쌓여 있고, 처마에도 커다란 고드름이 달려 있다. 숙소 2층 계단을 올라가며 가벼운 고소증세가 왔다는 걸 알았다. 차를 타고 갑자기 고도를 올린 탓이다. 산악인들에게 가끔 제공되는 김명준씨 별장은 로프트형 목조 산장. 눈 속에 파묻힌 산장은 따뜻했고 침낭을 챙기면 많은 인원도 수용할 만큼 넓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노르딕Nordic Ski 스키를 타기 위함이다. 한국에는 아직 노르딕 스키를 탈 수 있는 대중적인 스키장이 없다. 그러나 이곳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노르딕 전용 스키장이 있다. 평균 적설량 10m에 이르는 눈의 고장, 맘모스시의 메인 메뉴는 알파인 스키장이다. 맘모스 시내에서는 어디서나 맘모스산 정상이 보인다.

아이젠대신 노르딕 스키

해발 3,369m의 정상까지 곤돌라가 줄지어 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제 노르딕 전용 스키장까지 개장하면 드디어 겨울 스포츠가 꽃을 활짝 피운다. 얼음 바닥에서는 스케이트가, 눈이 쌓인 호수 위에서는 천연 아이스 하키장도 만들어진다. 엔진 소리 요란한 스노모빌은 눈 덮인 설국을 종횡으로 누비기 시작할 것이고.

이곳 노르딕 전용 스키장은 특별하다. 맘모스시는 빙하가 만든 7개의 자연호수를 품고 있다. 하나하나가 개성 넘치는 아름다운 호수이기에 시 당국은 그 호수를 탐방하는 포장도로를 잘 닦아 놓았다. 그 도로에 눈이 쌓이면 바로 그곳이 노르딕 스키장이 되는 것. 도로와 자전거 전용도로, 그리고 산책로와 샛길까지 합치면 수십km의 노르딕 스키장이 탄생한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설국 속에서 먹는 컵라면 맛은 기가 막혔다.

눈 덕분에 먹고 사는 도시답게,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 수십 대의 최신 제설차와 수십 년간 쌓인 눈을 치웠던 노하우. 전 세계에서 눈 다루는 월드컵 시합이 있다면, 이 산간도시가 단연 금메달 감. 축적된 경험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폭설이 아니라 이번처럼 눈폭탄이 와도 금방 치워버린다. 도로는 물론 숙소 문 앞까지. 그래야 먹고 살 수 있는 산간도시니까. 우리가 타는 노르딕 전용 스키장도 멋지게 아주 예술적으로 가공해 놓았다.

노르딕 스키장 입구에서 전용 스키를 빌리고 입장권을 샀다. 처음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명준씨가 스키 신는 방법과 주행요령까지 알려 준다. 노르딕 스키는 알파인 스키와는 다르다. 노르딕 스키 부츠의 앞쪽은 바인딩에 고정되어 있다. 걸을 때 뒤꿈치가 스키에서 떨어지는 구조. 부츠 앞쪽부터 뒤쪽까지 스키에 고정하는 알파인 스키와는 다르다.

그리고 눈으로 묘기를 부리는 맘모스시답게 설원에 두 줄의 홈을 파 놓았다. 이미 파인 두 개의 홈에 스키를 고정하고 앞으로 쭉쭉 밀고 나가기에 초보도 금방 적응이 된다. 좀 더 익숙해지자 홈에서 벗어나, 스케이트 타듯 8자로 밀며 눈밭을 달리는 사람도 생겼다.

넘어진 재미한인산악회원. 눈에 한번 빠지면 혼자 일어서기도 힘들다.

스키로 설원에 그림을 그리다

활강스키와 타는 법이 완전히 다른 노르딕 스키는 그 나름 재미있다. 오르막은 어렵지 않다. 뒤축이 들리는 노르딕 스키는 뒤로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스키스톡을 번갈아 찍으며 그 리듬에 맞춰 앞으로 발을 밀면 된다. 그래서 운동이 안 될 거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 세계 최강 노르웨이 노르딕 크로스컨트리 스키 동영상은 누구나 봤을 것이다.

그 엄청난 허벅지 근육으로 인구 520만 명의 작은 나라 노르웨이는, 동계올림픽을 압도하고 있다. 알파인 스키는 내려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노르딕 스키는 전신 운동이기에 힘으로 오르내리는 운동이다. 오르막이나 평지는 재미있지만 내리막을 만나면 긴장되었다. 파인 홈에서는 엉덩방아 외에는 정지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평소 잘 쓰지 않던 근육들이 혹사를 당하는 중. 어느 회원은 가파른 내리막에서 아예 스키를 벗어 짊어지고 내려가기도 한다. 남이 넘어지면 신나게 웃는 즐거운 노동이었고, 각기 저 나름의 기교로 눈밭을 지쳐갔다. 푸른 물이 찰랑이던 호수는 모두 평평한 설원이 되었다.

시에라산맥에 30년 만에 최대 폭설이 내렸다. 지붕만 살짝 보이는 집이 수두룩했다.

노르딕으로 설원을 횡단하는 스키어가 튕겨내는 눈조각들. 그게 햇빛 속에 보석처럼 빛난다. 아득한 호수 설원에는 여러 사람들이 점이 되어 노르딕을 즐기고 있다. 겨울동화처럼 잘 그린 주변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기꺼이 풍경이 된 사람들. 시인은 하얀 종이 위에 손으로 시를 쓰지만, 저 사람들은 순백의 눈 위에 발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청명한 군청색 하늘 아래 시에라산군의 겨울 풍경이 그야말로 압도한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처럼 과장되게 예쁘게 그린 그림 속.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도 식후경. 점심을 먹기 위해 스키를 벗으니, 허리까지 푹! 빠진다. 한 번 빠지자 일어서려는 동작에도 무척 힘이 든다. 겨우 눈밭을 다지고 제트보일로 물을 끓였다. 아침에 숙소에서 싸 온 샌드위치와 컵라면. 눈부신 겨울왕국에서 먹기에 조금쯤 컵라면이 빈약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맛만은 미슐랭 별 5개짜리 음식이 부럽지 않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가 제일 사랑했다는 시에라산맥. 그 사람은 갔으나 이곳 그림은 아직 회사에 걸려 있다. 북쪽으로는 요세미티국립공원, 남쪽에는 세쿼이아와 킹스캐니언국립공원이 잇대어 있는 풍경구들. 그 모둠 세트 핵심에서 먹는 따끈한 컵라면 국물 맛이라니.

노르딕 스키를 즐기는 스키어 뒤로 보이는 검은 기둥은 화장실 굴뚝이다. 그만큼 눈이 많이 쌓였다.

58시간 만의 조난자 구조 소식

저녁엔 따뜻한 별장에서 고기가 구워지고 와인이 돌았다. 누군가 뉴스 속보를 전한다. 놀라운 소식에 모두 박수를 쳤다. 발디봉(3,068m)에서 실종된 한국 산악인 정진택씨가 구조되었다는 것. 이틀의 눈 속 비박, 무려 58시간 만에 구조.

지난 호에 연재한 대로, 우리도 지난 1월 1일 그 산을 올랐다. 그때 우리도 발디 정상에서 위험에 맞닥뜨렸었다. 방향 감각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화이트아웃, 정씨도 그것 때문에 조난했던 것. 실종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시간이 지나며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지난겨울 이미 한국인 한 명과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배우를 포함 3명이 발디에서 조난사했다. 동상으로 코끝과 손가락이 까매진 정씨가 58시간을 버티고 구조된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그날 밤 방마다 "아이고~" 신음소리가 난무했다. 같은 한국 산악인 생환에 기뻐 우는 소리가 아니다.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혹사시킨 결과물이었다. 이튿날, 간밤의 신음은 잠꼬대라도 되는 듯 다시 노르딕 스키를 타러 나섰다.

그러고 보니 경사각이 있는 설벽을 피켈을 휘두르며 오르는 산행만 설산을 즐기는 게 아니다. 아이젠과 얼음도끼만 눈과 가까워지는 방법도 아니었다. 노르딕 스키는 눈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맞았다.

북쪽으로 톱날처럼 삐쭉삐쭉 서있는 미나레츠Minarets 침봉들이 보인다. 바늘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3,000m급의 화강암 봉우리들. 첨탑들은 서로 어깨 걸고 코발트빛 하늘을 찌르고 있다. 산장은 아예 눈에 파묻혀 지붕만 보인다. 두꺼운 무명 이불처럼 지금 대지는 눈을 뒤집어쓰고 겨울잠에 빠져 있다. 그러나 봄은 저만치에서 슬금슬금 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가 노르딕으로 건넜던 설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 팔뚝만 한 송어가 뛰어 노는, 푸른 물결 찰랑이는 봄 호수로의 변신. 무릇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랴. 2박3일 행복했던 겨울왕국에서의 노르딕 스키. 눈부신 설국 눈도장을 찍었던 기억은 지금부터 추억의 창고에 갈무리될 것이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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