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예술성에는 장애가 없다

정상혁 기자 2023. 3. 3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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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예술인 생산 창작물 우선 구매 제도’가 28일부터 시행됐다. 앞으로 미술관·박물관 등 공공기관 847곳은 매년 구매 예산의 3% 이상을 장애인 창작물 구입에 써야 한다. 이를 통해 장애 예술인의 창작을 장려하고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직업 예술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며 “약자 프렌들리 문화 정책의 역사적인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취지는 좋다.

그러나 화업(畵業)의 지속을 돕는 것과 그들의 작품을 의무 구매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공공 미술관의 소장 결정은 해당 작품이 한국 미술사의 의미심장한 족적이라는 공식 인증과 같기 때문이다. 일부러 기부해 자기 작품을 미술관에 맡기려는 작가도 심심찮게 나올 정도다. 한 큐레이터는 “작품 수집 기준은 오로지 예술성이어야 한다”며 “도리어 장애인 예술품은 공공기관이 정부 지침에 떠밀려 사야 하는 수준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물관은 더 큰 고민에 빠졌다. ‘장애인 유물’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문체부 관계자는 “기관 특성에 따라 비율을 협의할 수 있도록 특별 조항을 뒀다”고 말했다. 지난해 청와대 개방 후 열린 첫 전시 주인공은 장애인 화가들이었다. 대통령의 장애인 예술 사랑은 취임 초부터 확연했고, 이번 조치 역시 그 연장선으로 이해된다.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 전시 및 교육 지원 등으로 장애인들의 창조적 연마를 돕는 정책은 확산돼야 한다. 다만 결과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작품에는 장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화가 댄 밀러(62)의 그림은 미국 최고 수준의 국립 미술관으로 꼽히는 스미스소니언미술관(SAAM)에 소장돼있다. 댄은 발달장애인이다. 현대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뉴욕현대미술관(MoMA)도 그의 그림 세 점을 갖고 있다. 장애인이기 이전에, 그를 예술가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예술적 배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장애를 물리치며 예술혼을 불사르는 수많은 작가에 대한 모욕이다.

구본웅은 척추 장애인이었고, 운보 김기창은 청각 장애인이었다. 모두 20세기 한국 회화의 거장으로 불린다. 화가 박대성(78)씨는 빨치산이 휘두른 낫에 왼손을 잃었다. 그럼에도 독보적 수묵화의 영토를 개척해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그의 수식어는 장애인이 아니라 화가다. 그러나 시선이 작품성보다 할당 조건에 먼저 맞춰지는 한, 이들은 여전히 장애인으로 남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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