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의 우회도로] 영화로운 스필버그

백승찬 기자 2023. 3. 3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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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진지하다고 생각하는 1980~90년대 영화팬들 사이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백안시되곤 했다. 마틴 스코세이지, 데이비드 린치 혹은 팀 버튼을 언급해야 미국 영화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 시절 스필버그는 상업적으로 뛰어나지만 깊이는 부족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처럼 인식됐다. 어린이나 청소년도 보기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로 ‘피터팬 콤플렉스’와 연관해 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쥬라기 공원>의 흥행수입이 자동차 150만대 수출과 맞먹는다”는 식으로 영화의 산업적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영화팬들은 영화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이런 인식이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쥬라기 공원> 사이에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쉰들러 리스트>는 상업적인 감독이 자신도 진지한 감독이라고 애써 주장하는 이례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백승찬 문화부장

스필버그에 대한 내 인식이 바뀐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즈음해서였다. 영화 시작과 함께 펼쳐지는 노르망디 상륙 장면은 충격이었다. 그 어떤 전쟁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참혹한 전장 한복판으로 관객을 끌고간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차기작인 <A.I.>(2001)는 21세기를 여는 걸작이었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빌려 인공지능과 인간의 기묘한 관계를 탐구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우주전쟁>(2005) 등 줄줄이 수작이었다. 스필버그는 유쾌한 모험의 세계에서 테크놀로지에 대한 냉소적 탐구로 시선을 넓히고 있었다.

지난주 개봉한 <파벨만스·사진>는 스필버그의 34번째 장편영화다. 공룡, 외계인, 사이버세상을 그렸던 스필버그가 7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본 자전적 작품이다. <파벨만스>에는 평생 영화로 사유하고 사랑하고 삶을 살아냈던 노감독의 통찰이 담겨 있다.

소년 새미는 무서워서 안 들어간다고 버티다가 부모님의 설득에 처음 영화관에 들어가 기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새미는 이 충격을 소화하기 위해 장난감 기차로 비슷한 장면을 재현한 뒤 이를 카메라에 담아 수차례 반복해 관람한다. 영화는 세계를 재현하며 관객의 감정에 큰 충격을 줄 수 있고, 영화감독이란 그런 힘을 가진 사람임을 소년은 부지불식간에 인식한다. 카메라의 힘은 놀라워서, 무심결에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무의식중 알고 있지만 차마 드러내지 못한 진실을 영화는 밝혀낸다.

새미는 슬럼프에 빠진다.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청소년이 감당하기에는 영화 매체의 힘이 너무 강력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학교 행사 촬영을 계기로 다시 카메라를 잡은 새미는 평소 원한이 있던 급우를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멋있게 담아낸다. 급우는 기뻐하기는커녕 스크린에 나온 사람은 현실의 자신이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괴로워한다. 영화는 생물과 같아서, 때로 창작자의 의도나 권한을 넘어 스스로 움직인다.

새미의 아버지는 컴퓨터공학자, 어머니는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였다. 마치 스필버그 영화의 두 가지 축,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인격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론적으로는 펜과 종이만 있으면 쓸 수 있는 문학과 달리, 영화는 당대의 최신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을 때 가끔 ‘기술 과시를 위한 영화’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예민하고 능란한 창작자들은 곧 기술을 최적의 조건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낸다. 기술의 벽을 미학의 도전으로 극복하기도 하고, 기술의 벽 너머에서 새로운 미학이 탄생하기도 한다. 새미의 아버지는 기술의 대가인 동시,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탄탄한 재정적 뒷받침을 하는 것으로도 묘사된다. 스필버그의 영화 같은 기술집약적 작품에 할리우드에서만 동원할 수 있는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편의 걸작을 남긴 채 사라지는 감독은 많다. 10~20년의 전성기 동안 괜찮은 영화 몇 편을 남긴 채 사라지는 감독도 많다. 스필버그는 1976년 <죠스>에서 시작해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모두 오스카 작품상,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60년간 전성기를 이어가는 셈이다. 물론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가 걸작은 아니지만, 이럴 때 스포츠계의 격언을 잠시 빌려와도 좋겠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백승찬 문화부장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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