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현장] ‘선택적 추모’를 넘어

정유선 기자 2023. 3. 3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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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제주여행은 4·3을 알기 전과 4·3을 알고난 후로 구분될 것 같다. 유채꽃 흐드러진 샛노란 제주를 그렸는데 3월말 방문한 제주는 쌀쌀한 빗방울이 흩날리는 무채색에 가까웠다. 축축한 바람에는 왠지 붉은 핏방울의 내음이 묻어나는 듯 했다.

제주 봉개동 4·3 평화공원 전시관에 입장하면 아무런 비문도 쓰여지지 않은 채 누워있는 ‘백비’를 마주하게 된다. 4·3백비는 75년이 되도록 이름 짓지 못한 아픈 역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불려왔지만 4·3 뒤에 붙일 정확한 이름은 아직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긴 설명을 가질 뿐이다.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는 게 공식 정의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인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4·3이 세상에 알려진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4·3은 낯설고 우리와는 관계 없는 제주만의 역사로 보인다. 제주가 4·3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4·3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를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남의 일 같았다.

이번에 4·3사건 75주년 계기 프레스투어를 통해 평화공원 위령비를 꼼꼼히 훑어보고, 너븐숭이 4·3 기념관과 애기무덤을 직접 보고, 관덕정 터와 원도심 유적까지 4·3의 기억들을 오롯이 살려보고 나서야 제주가 얼마나 피와 눈물이 사무친 땅인지를 알게 됐다. 여전히 제주 곳곳엔 4·3 희생자 영령을 추모하는 현수막과 ‘4·3은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보수단체 현수막이 뒤엉켜 나부끼고 있었다. 여전히 진영별로 갈리는 이념의 구호로 제주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맞는 올해 제75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불참한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지난해 당선인 신분으로 4·3 추념식에 참석해 국민 통합 메시지를 발신했던 윤 대통령이 올해는 일정 등의 이유로 불참을 알린 것이다.

반면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번 4·3 추념식 당일 제주4·3 평화공원을 찾아 참배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06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선 처음으로 참석해 국가폭력에 의해 이뤄진 희생에 대해 공식 사과한 바 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누구의 죽음을 얼마나 더 추모할 것이냐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 문제다. 가히 ‘추모의 정치’라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며칠 전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제2 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 등에서 전사한 55명의 장병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울먹였다. 윤 대통령은 이후 다른 자리에서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장병을 생각하면 어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나”고 되물었다고 한다. 당시 기념식 이후 대통령실에는 유족과 장병뿐만 아니라 예비역 군인들과 많은 국민의 격려가 쏟아졌고 ‘이제야 나라가 정상적으로 가는 것 같다’는 반응들이 나왔다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그러나 이를 보도한 기사에는 “이태원 청춘들하고 서해 청춘들은 다른가” “꽃다운 나이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일제 피해자들은 왜 외면하느냐”는 등 부정적인 댓글도 달렸다.

‘누구의 죽음은 잊혀지고, 누구의 희생은 기억될 것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추모의 대상도 달라져왔고, 국가보훈처도 그에 맞춰 각종 보훈행사의 격과 비중을 달리해 왔다. 정권에 따라, 이념과 진영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뤄져온 추모가 이제는 좀 달라지길 바란다.


좌우 진영 논리를 극복하고 국민 통합에 앞장서겠다며 작년 제주 4·3과 광주 5·18을 잇따라 참석했던 윤 대통령이 초심을 잃지 않기를, 누구의 죽음도 소외되는 일 없이, 국민 전체의 마음을 보듬어 안고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유선 서울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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