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약자에게 귀를 더 열어야 하는 이유

한겨레 2023. 3. 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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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윤석열 대통령이 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박복영 | 경희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얼마 전 국책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 활동을 하는 비율이 소득 수준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소득 하위 20%가 직능단체에 가입한 비율은 상위 20%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런 단체에 가입하는 중요한 이유는 물론 단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한편 자기 이익이나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 의견을 전달하느냐는 물음에, 소득 상위 20%는 3분의 2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지만 하위 20%는 그 비율이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단은 이익이 침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절반 이상이 침묵하며 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전달할 방법을 찾기 어렵거나 그럴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는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여기서도 거의 비슷한 차이가 발견됐다. 저소득층의 경우 생계유지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저소득층일수록 자신들의 정치 행위가 사회나 자신들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점도 주목해야 하다. 소위 정치효능감이 낮다는 뜻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거나 의견을 표출하기도 어렵고, 표출해도 반영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행동은 더 소극적이 된다. 표현되지 않으니 이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정책이 채택될 가능성도 작을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특정 계층의 목소리나 이익이 편향되게 정치에 반영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것이다.

미국에는 이미 이에 관한 연구가 여럿 있다.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인 래리 바텔스 밴더빌트대 교수는 미국 상원의원들이 저소득층의 요구는 무시하는 반면, 고소득층의 의견은 충실히 대변한다는 것을 통계로 입증했다. 고소득층의 요구가 입법화될 확률도 저소득층의 경우보다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났다. 보수적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이 특히 그랬다. 그는 이런 현실을 “불평등 민주주의”라고 표현했다. 모두에게 같은 한표가 주어진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평등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불평등한 민주주의는 다시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런 현실은 우리 모두 주변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다. 학자들은 단지 이 평범한 사실을 통계로 입증했을 뿐이다. 경제적 자산이 많으면 더 쉽게 단체를 조직하고 언론이나 기관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더 편리하게 세상에 알릴 수 있다. 그러면 그런 의견이 정책으로 채택될 가능성도 커진다. 문제는 정치적 영향력의 비대칭성이 경제적 격차가 벌어질수록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소득 최상위 집단의 소득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다. 국세청 소득신고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상위 0.1%의 연평균 소득은 무려 33억원이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이 하위 계층 한 사람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 정부는 국가전략기술로 지정된 반도체 대기업에 세액공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애초 6% 공제율을 여야 합의로 올해부터 8%로 높였는데, 더 확대하라는 대통령 지시 한마디에 정부는 공제율을 다시 15%로 올리려고 한다. 한 연구소의 추정에 따르면, 이럴 경우 삼성전자 한 기업의 올 한해 세금 감면액만 최대 7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추가 공제를 한다고 해서 미국처럼 해외 기업을 유치하는 것도 아니고 기업에 경영정보 제출이나 사회적 의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7조원은 어느 정도 규모의 돈인가? 정부는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기초생활수급 가구에 생계급여를 지급하는데, 올해 그 전체 예산이 6조원이다. 그 수급자 수는 110만가구, 150만명에 이른다. 지난해와 대비해 예산 6천억원, 가구당 급여 5.4%를 늘리기 위해 부처와 기관들은 온갖 분석을 하고 줄다리기를 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최대 규모 기업에 대한 조 단위 지원 확대는 너무 쉽게 결정되고 있다. 세액 감면율의 근거도, 예상 효과에 대한 분석도 없다. 세상에 반도체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떠들썩하니 우리도 화끈하게 지원하자는 것뿐이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주변의 큰 목소리만 듣고 정책을 만들면 정부도 민주주의도 모두 위태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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