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누구와 함께 늙어갈 것인가

김은형 입력 2023. 3. 29. 18:35 수정 2023. 3. 2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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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영화 <노후자금이 없어!> 포스터. ㈜얼리버드픽쳐스 제공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절친 중 하나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안낳은 노키드족이다. 중학생부터 취업준비생까지 다양한 연령대 자식들 문제로 속을 끓이는 친구들을 보면 “역시 무자식 상팔자구나” 하다가도, 가끔 “그래도 애가 있었어야 하나 싶어”라는 말을 툭 던진다. “넌 늙어서 아프면 자식이 들여다볼 거 아냐. 우리는 둘밖에 없잖아.”

나는 말했다. “이 아줌마야, 정신 차려.”

나도 내가 미열이라도 나면 뛰쳐나가 약을 지어오고 ‘어머니 기체후일향만강하시옵소서’라고 말해주는 자식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자식을 키우는 행운은 내게 오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뿐이다. 자식이 일곱 정도면 모를까, 훗날 고달픈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픈 엄마를 보러오느라 주말 짧은 휴식을 뺏기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형제자매가 셋인데도 아버지상 치를 때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걸 보면, 내 장례도 내가 미리 준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친구가 말한다. “그래도 응급상황에 연락할 데라도 있잖아”

나는 대답했다. “야, 나한테 전화해. 내가 구급차 보낼 테니.”

내가 기혼자임에도 최근 출간된 <에이징 솔로>를 찾아본 이유는, 노년에 어떤 이들과 늙어갈 것인가는 솔로뿐 아니라 많은 무자식, 유자식부부도 가진 고민이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하나나 둘 뿐인 자식한테 부양을 기대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부부간 문제는 좀더 미묘하다. 돌봄에 있어 상호안전망이 될 수 있지만 일방적인 착취구조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정서적 돌봄까지 고려한다면 배우자만으로 노년의 소통과 관계를 만족할만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오십대가 되면, 특히 여자들은 친구들과 모여 사는 노년의 삶을 종종 이야기한다. 가까이 살면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밥 해먹고 아프면 운전을 해주거나 택시라도 불러 병원도 같이 가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 상상은 하루하루가 여행 같고 재미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다들 한두번 경험이 있지 않은가. 베프와 함께 여행 가서 절교 직전까지 대차게 싸운 기억 말이다.

십년 전쯤 공유주택(셰어하우스), 공동체 주택, 협동조합주택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젊은 층은 한 집에서 거실, 화장실 등을 공유하는 공유주택이,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가구는 분리하되 커뮤니티는 강화한 공동체/협동조합주택이 인기를 끌었다. 은퇴를 준비하며 오랜 시간 투자해 친구들과 공동체 주택을 지은 선배는 후배들 선망의 대상이 됐다. 선배한테 소감을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은 래*안이야.” 반전을 넘어 마음에 사막의 모래 한포대기를 뿌린 듯한 이 말은, 가까운 이들과 가깝게 사는 일이 대형 아파트 단지에서 익명으로 사는 것보다 힘들다는 의미일 터.

수많은 연구가 노년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관계’라고 설파하지만, 관계가 중요해질수록 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고민도 커진다. 선배의 경험담이나 공유주택 바람이 시들해진 건 이웃을 내가 선택했음에도 이웃간 적당한 거리를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처럼’ 가까워진다는 건 가족처럼 피곤한 관계가 된다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에이징 솔로>에 나오는 인터뷰 가운데 “간헐적 식구”라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밀도 있는 우정보다 가족처럼 맘 편하게 밥 한끼 같이 먹을 수 있는, 하지만 그게 매일 반복되지는 않는 적당한 거리를 담고 있다. 어렵지 않게 베풀수 있는 선의와 도움이 오가면서도 선의가 더 큰 선의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지 않는 관계 말이다.

노년을 준비하며 노력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적당한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친구들뿐 아니라 부부나 혈연가족 안에서도 그렇다. 이 거리만 유지된다면 명절 때 상을 엎는 일도, 이혼 전문 변호사를 찾아가는 일도 사라질 테니.

지난해 본 <노후자금이 없어!>라는 일본 코미디영화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결론을 보여준다. 자식들을 독립시키고 이래저래 노후자금이 부족하게 된 부부는 고민 끝에 공유주택에 들어가는데, 이곳은 비슷한 연령대나 비슷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학생이 있는가 하면,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도 직장인도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각별한 관심은 없고 주말에 시간되는 사람들끼리 밥 한끼 함께 먹거나 간단한 도움을 주고받는 정도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주는 다양한 이웃들. 네?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노인네들의 바람이라구요? 너도 늙을 텐데요, 전 이만.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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