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법은 평등한 겁니까?

한겨레 2023. 3. 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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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그런데 대구지법 형사항소4부(재판장 이영화)는 새로운 증거자료가 제시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검증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무죄를 선고했다. 수십명 증인신문, 수천장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들, 세차례에 걸친 현장검증 결과 네곳 재판부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했는데, 그 모든 게 부정됐다.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믿음도 사라졌다.
금속노조가 지난달 23일 오전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파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아사히글라스와 하청업체에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재판부를 규탄했다. 김규현 기자

차헌호 |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지회장

“피고인 하라노 타케시, AGC화인테크노코리아(아사히글라스) 주식회사 각 무죄.”

믿기지 않았다. 판결문을 읽는 판사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결국 마지막 주문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정을 가득 메운 우리 노동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충격이었다.

“무죄가 말이 됩니까. 그럼 이전의 네곳 재판부 판결은 모두 잘못됐단 말입니까? 이게 재판입니까!” 나도 모르게 판사를 향해 소리쳤다. 판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했다. 올해 2월17일 대구지법 아사히글라스 불법파견 형사사건 항소심 선고 법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9년째 법적다툼을 벌이고 있다. 아사히글라스는 파견법 위반으로 기소돼 1심에서 일본인 대표이사는 제조업 최초로 징역형을, 법인은 벌금 1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앞서 고용노동부와 검찰 판단처럼 법원에서도 네차례나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 1, 2심과 직접고용의무 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 형사사건 1심까지. 그런데 대구지법 형사항소4부(재판장 이영화)는 새로운 증거자료가 제시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검증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무죄를 선고했다. 수십명 증인신문, 수천장에 이르는 방대한 증거들, 세차례에 걸친 현장검증 결과 네곳 재판부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했는데, 그 모든 게 부정됐다.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믿음도 사라졌다.

무죄판결을 내린 항소심 재판부 주심인 김아영 판사는 민사소송에서 아사히글라스를 변호하고 있는 대형로펌 태평양 출신이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라면, 당사자가 판결 결과를 수긍하길 바랐다면, 스스로 회피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재판은 이미 끝났고 우리에겐 허무함만이 남았다. 검찰은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은 법리 오해와 채증법칙 위반의 위법이 있다”며 즉시 상고했지만, 9년째 지난한 싸움을 해온 우리 노동자들의 꿈과 희망이 짓밟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2차 세계대전 전범기업이자 일본 3대 그룹인 미쓰비시 계열사인 아사히글라스는 지난 2004년 경상북도 구미시에 입주했다. 외국인투자기업으로 토지 12만평 무상임대, 15년간 지방세 감면, 5년간 세금 면제라는 특혜를 받아 국내에 진출해 연평균 1조원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20분에 불과한 점심시간, 최저임금 수준의 적은 급여, 사소한 잘못에도 징벌조끼를 입고 일하도록 하는 인권침해, 잦은 권고사직 등 최악의 노동조건에서 일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2015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2주 만에 하청노동자 178명 중 138명이 가입했다. 아사히글라스는 노조설립 한달 뒤 이 하청업체와 계약을 해지했다. 계약해지된 하청업체는 하청노동자 178명에게 문자로 해고를 통보했다. 아사히글라스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부제소 합의서를 작성한 이들에게만 희망퇴직금 1천만원을 지급했다. 결국 22명이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아사히글라스를 상대로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올해로 9년째다. 애초 2015년 고용노동부에 고소한 불법파견 사건은 2년이 지나서야 대구지검 김천지청으로 넘어갔고, 김천지청은 노동부에 몇차례 재수사 명령을 내려 시간을 끌더니 2017년 12월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에 항고해 대구고검에서 5개월 만에 재기수사명령을 내렸지만, 사건을 다시 맡게 된 김천지청은 여전히 시간을 끌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에 2018년 12월27일 우리는 대구지검 로비에 들어가 눌러앉았다. 조합원 11명이 연행됐다. 검찰청에서 연행된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 기사가 나오자, 김천지청은 사건을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로 넘겼다. 이듬해 2월 대검 수사심의원위는 아사히글라스 기소 권고 결정을 내렸다. 결국 고소 4년 만엔 2019년 2월15일 아사히글라스 대표이사와 법인이 기소됐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에서는 노동부도 수사기관도 법원도 미루기, 시간 끌기를 계속했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제27조 제3항)은 우리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9년 동안 법은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억울함을 직접 증명하라고 끊임없이 되물었다. 법과 제도는 우리가 길거리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 같았다.

겨우 어렵게 열린 재판도 노동자의 편에 서 있지만은 않았지만, 하염없는 기다림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 현재 아사히글라스 사건 재판은 대법원에 3개, 대구고등법원에 1개 계류돼 있다. 대법원에서만 4년11개월째 계류 중인 사건도 있다. 이미 지연됐지만 더는 미뤄지지 않는 정의를 22명 해고자는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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