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일자리 찾아 현해탄 건넌 조선인들

입력 2023. 3. 29. 18:10 수정 2023. 4. 1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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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경기 불황에 '그냥 노는' 청년들 50만명 시대 100년전 조선도 실업난… 취업 하러 일본으로 잡부·짐꾼·청소부 등 종사… 입에 겨우 풀칠만 살기 좋은 사회 만들어 과거의 되풀이 막아야

청년 실업이 늘어나고 있다. '그냥 노는' 청년들만 50만명이라 한다. 100년 전에도 실업자들은 많았다. 조선에 일자리가 없자 대거 일본으로 떠났다. 그 모습을 한번 엿보기로 하자.

1923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생활난의 장본(張本; 근원)이 되는 14만의 유민(遊民), 조선인 19만명에 무직자 14만명, 일본인 7만명에 무직자 4만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누가 살기를 꾀하지 아니하며 누가 살려고 애쓰지 아니하랴. 이미 살았는지라 살려고 애씀이 당연한 일이며 죽기가 싫은지라 살기를 꾀함이 떳떳한 현상이라 (중략) 일하기 싫어서 노는 사람이나 일할 능력이 없어서 노는 사람이나, 일할 거리가 없어서 노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먼저 경성의 형편을 들어 전 조선의 형편을 알아보고자 하노라. 경성부 통계를 보건대 전체 경성 안에서 살아가는 남녀노소의 내외국인이 모두 271,414명이며, 그중 조선 사람이 194,235명이라 한 즉, 조선인 중 유직자는 51,071명, 무직자는 142,525명인데 이로써 보아 못 살겠다는 부르짖음이 과연 당연하며 헐벗어 우는 모양이 괴이치 아니한 터이다. 이를 조선인과 외국인을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은데, 전체 조선인의 73.4%가 실업자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남녀의 인구별로 무직자를 조사한 것인데, 여자의 95%가 무직자로 이것은 조선의 가정 제도의 결함에서 원인을 말하고 있었다."

실업이 이렇듯 많은 것은 당연히 일자리 부족이 원인이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많은 동포들이 해외로, 특히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이 땅을 떠나게 된다. 1922년 12월 15일 조선인의 일본 도항(渡航)에 필요한 여행증명서 제도가 철폐되면서 일본으로의 도항은 격증하게 된다.

1923년 3월 20일자 매일신보에 '매일 1천명씩 연락선으로 일본에 수용'이란 제목의 기사다. "요사이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건너가는 자가 날로 늘어서 하루에 1천여명 이상에 달하여 모지(文司) 철도국에서는 이 여객 수용에 매우 고심하는 모양인 바 (중략) 이 현상은 조선 사람에 대한 여행증명서 철폐와 조선 내의 경제공황으로 인함인 듯도 한데 (중략) 요사이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은 하루에 두 번 내왕으로 2천여명의 승객을 일본에 수송하는데 이 중 6~7할은 일본으로 가는 조선인인바 (중략)."

이렇게 떠난 일본에서의 생활은 과연 어떠했을까. 괴로움을 피해 떠난 그곳은 행복의 땅이였을까. 1923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이역(異域)의 노동 생활, 오사카(大阪)의 3만 동포'란 제목의 기사다.

"조선의 농민이 조선에서 농토를 빼앗기고 할 수 없이 생활의 방도를 고쳐 남의 땅으로 나가 평생 아니하던 공장일을 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는 수효도 날마다 늘어간다. (중략) 작년에 동경에는 '일본 재류(在留) 조선노동자 상황조사회'가 생기고, 경성에는 '재외 조선인 노동자 상황조사회'가 생겨 그동안 동경에 있는 조사회에서는 우선 오사카 지방의 우리 노동자 상황을 조사하여 그 상황을 경성 조사회로 보고하였는데 (중략) 동경 조사회의 보고에 의한 오사카 내 조선 노동자의 상황은 어떠한가. 먼저 인구로 말하면 작년 12월 말 조사에 남자 24,490명, 여자 3,760명으로 도합 28,250명인데 이를 원적지의 지방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한다."

조사에 따르면 경남이 6,5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제주 (5,150명), 경북(5,000명), 전남(3,200명) 순이었다. 함남이 600명으로 가장 적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많은 것은 땅이 척박해 논농사도 못짓고, 육지로부터 수탈을 시도때도 없이 당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니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행을 택했다.

그렇다면 28,250명의 조선 노동자는 오사카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했을까. 실업자가 가장 많았다. 총 7,350명이었다. 이어 잡부(雜夫)가 5,890명, 짐꾼이 1,600명, 공사판 막벌이꾼이 1,530명, 도로 건설 노동자가 1,200명 순이었다. 이 밖에도 방직제사공, 염색공, 점원, 청소부, 선박 인부, 철공부(鐵工夫) 등으로 일했다.

그들이 얼마를 벌었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들의 하루 임금이 나와 있다. 공사판 막벌이꾼이 2.3원, 짐꾼이 2.3원, 철공노동자가 1.6원, 공장노동자 1.3원 등 평균 1.85원이었다. 겨우 하루 벌어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일제강점기 1원이면 요새로 치면 1만원 정도 된다. 김동인의 소설 '감자' 주인공 복녀(福女)는 열다섯 나이에 80원이라는 돈에 팔려 20년이나 연상인 중늙은이 홀아비에게 시집을 갔다. 요새 돈으로 80만원 되는 셈이다.

이렇게 조선인들이 먹고 살기위해 일본으로 대거 떠나자 그 빈자리를 중국인 노동자들이 메웠다. 1923년 3월 20일자 조선일보에 '대련(大連)으로부터 온 수천의 중국인 노동자'라는 기사가 보인다.

"3월 중순경부터 중국 대련 방면으로부터 인천항에 하륙한 중국 사람이 수천 명에 달하였는데, 그 다수한 사람이 대부분은 노동자로서 (중략) 이번에 입항한 노동자 중에서 약 3할가량은 인천에 있어 농업과 또는 각종 노동에 종사하고, 그 외의 대부분은 경성 방면과 경의선을 타고 다른 곳으로 향해 갔다는 바 (중략) 중국 노동자가 건너왔다고 하면 그 수효만큼 타격을 받는 모양이니 이것이 어찌 두려워 할 일이 아니리요. 당국에서도 한 번 생각해 볼 점이 없지 아니하다고 여론이 많다더라."

떠난다는 뜻의 한자 '이(離)'는 어린 새가 둥지 위로 고개를 내민다는 뜻이라고 한다. 즉 어린 새가 처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비행할 준비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이별이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는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살길을 찾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100년 전 부산항의 조선인들, 그들의 눈물이 이제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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