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훈칼럼] 다시 등장한 대공황 때 '시카고플랜'

송성훈 기자(ssotto@mk.co.kr) 2023. 3. 2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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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질서 재편 착수
기존 관행 파괴 대책 잇따라
은행 신용창출 기능 회수 등
평소 상상 못할 조치 대비해야

2008년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수습 과정에서 만들었던 '도드-프랭크법'이 최근에 그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서다. 은행에 충분한 자본 확충을 강제했지만 구멍이 많았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대처법은 기존과 달랐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대책을 놓고 그는 지난 12일 "더 이상 구제금융은 없다"고 단언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배운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그 대신 예금자 전액 보호라는 새로운 카드를 내밀었다.

국민 세금을 쓰지 않고 그게 가능할까 의심했다. 해법은 나흘 뒤에 나왔다. 파산설에 휩싸인 퍼스트리퍼블릭 구제에 11개 대형 은행을 끌어들였다. 옐런이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에게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다이먼이 다른 금융사들을 설득하는 방식이다. 구제금융은 없다는 옐런의 새 원칙은 지켰지만, 신종 '팔 비틀기'다.

이번엔 유럽으로 번졌다. 크레디트스위스(CS)가 휘청거렸다. 정부의 중재(?)로 UBS가 30억스위스프랑에 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 과정에서 채권은 주식보다 안전하다는 통념을 깨버렸다. 자본 확충을 위해 선호됐던 채권이 휴지 조각이 됐고, 은행은 자본 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2023년 봄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은행 위기는 종전과 다른 양상이다. 별다른 조기경보 없이 순식간에 뱅크런이 들이닥쳤고, 초대형 은행마저 쉽게 파산에 몰렸다. 대마불사는 여전했지만, 금융당국의 대처법은 새롭게 진화하면서 또 다른 규제를 예고하고 있다(기존 관행을 파괴하는 일련의 강성 조치를 보면서 나는 오히려 금리 인상을 강행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해석했다).

급한 불이 꺼지자 백가쟁명식의 묘안이 쏟아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시카고플랜'이다. 대공황을 경험한 미국 경제학자들이 제안한 화폐개혁 보고서다. 1939년 어빙 피셔를 비롯한 6명의 경제학자가 초안을 썼고, 미국 157개 대학의 경제학자들이 참여해 235명이 승인했다. 핵심 주장은 이렇다. 경기 변동의 상당 부분은 은행의 신용 창출 기능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국가가 이를 회수하자는 주장이다. 피셔는 크게 네 가지 이점을 명쾌하게 소개했다. 신용 창출 변동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반복적인 경기 변동을 줄일 수 있고, 예금이 100% 지급 보장을 받기 때문에 뱅크런을 아예 없앨 수 있으며, 국가 부채를 축소하고, 민간 부채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워낙 획기적인 내용이지만 다소 허무맹랑해 보여서 그런지 그 뒤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80년간 잠들었던 시카고플랜을 소환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였다. 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된 2012년 8월 IMF(국제통화기금)는 '다시 논의해보는 시카고플랜(The Chicago Plan Revisited)'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시카고플랜을 현재의 미국 금융 시스템에 적용해서 모델을 돌려봤더니 실증적으로 유효하다는 게 결론이다. 성장을 촉진하고 물가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마틴 울프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는 디지털화로 실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입장을 최근 피력하기도 했다.

금융위기 소방수로 뛰었던 티머시 가이트너 전 재무장관은 저서 '스트레스 테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기 중에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정상적인 시기라면 상상도 못했을 그러한 조치를 다수 취했다. 그러나 가능한 한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위기는 어쩌면 과욕의 결과다. 넘쳐난 유동성에 대한 뒤틀린 시장의 보복 과정이다. 한가하게 원래 이렇다 저렇다는 식의 원론적 대응으로는 백전백패다. '위기 땐 관치'라고 지난 가을칼럼 제목을 잡은 적이 있다. 요즘 상황을 보면 이 또한 한가해 보일 정도다.

[송성훈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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