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주주총회 또 없습니다 [김영희 칼럼]

김영희 2023. 3. 2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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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유독 크게 다가온 것은 한겨레가 ‘구중궁궐’처럼 됐다는 주주들의 질타였다. 고백하자면 최근 몇년간 보도 논란이 일 때마다 ‘모두가 주인이면서도 아무도 주인일 수 없는’ 한겨레에 쏟아지는 결이 다른 비판과 요구가 모순되거나 버겁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윤리와 신뢰 위기의 한복판에 서면서, 주주와 독자들의 비판 없는 한겨레는 언론으로서 존재할 의미가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2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35기 한겨레신문사 정기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김영희 | 편집인

서울 효창공원 봄꽃이 망울을 터뜨리던 지난 25일, 공원 안 백범김구기념관의 접수대엔 아침부터 줄이 섰다. 1988년 국민주 방식으로 창간한 한겨레의 현재 주주는 6만9565명, 주주 가운데 95.13%는 200주 이하 소액주주다. 이날 한겨레신문사 35기 정기주주총회에 직접 참석한 주주는 370여명. 얼마 전 삼성전자 주총 참석자가 600여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남다른 참석률이다. 배당과 영업이익을 두고 질문이 이어지거나 대표이사 선임을 둘러싼 주주 간 합종연횡이 관심사가 되는 여느 주총과 풍경 또한 다르다.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하는 주주들 가로막기에 직원들이 동원되는 일도, 개회 선언 수십분 만에 일사천리 의안 통과로 끝나는 일도 없다.

3년 만에 코로나로 인한 인원제한 없이 열린 주총에, 하지만 설렘보다 무거운 마음이 앞섰다. 지난달 진상조사 결과를 공개한 석진환 전 신문총괄의 김만배씨 돈거래 사건에 대해, 한겨레는 영업 보고 등에 앞서 주주들에게 보고했다. 날 선 발언이 쏟아졌다. “십시일반으로 한겨레를 만들 땐 제도권 언론보다 월등한 언론을 만들어달라는 거였다. 우린 배신당했다.” “대장동 관련 악의적 보도를 많이 봤다. 기사 영향이 없다니 말이 되나.” “기득권 언론이 됐다. 한겨레 정신에 맞는 인적성을 가진 사람들을 뽑고 있는 거냐.” “언론권력의 부패를 막으려면 외부 견제장치가 필요하다.”

비판은 돈거래 사건에 한정되지 않았다. “3년 연속 흑자폭이 줄었는데 한겨레가 자초한 불신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주식을 사며 바란 건 손익은 근근이 맞추면 되고 민주언론을 지속해달라는 거 하나였다. 논조를 비판하면 ‘공정성’ 같은 변명만 한다. 왜 자랑스러움보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나.” “일제총독부와 다름없는 정권에 비판이 미온적이다.” “백두산 배경의 초기 제호를 기억한다. 한겨레답게 통일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반면 “국민을 위한 신문을 바랐는데 종북, 사회민주주의에 경도됐다”는 이들도 있었다. 유독 크게 다가온 것은 한겨레가 ‘구중궁궐’처럼 됐다는 질타였다. 제보나 의견에 피드백이 없다거나 주주들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것 같다는 목소리를 마냥 부정하기 힘들었다. 고백하자면 최근 몇년간 보도 논란이 일 때마다 외부의 비판에 오해가 적잖다고 서운해하거나, ‘모두가 주인이면서도 아무도 주인일 수 없는’ 한겨레에 쏟아지는 결 다른 요구가 모순되고 버겁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윤리와 신뢰 위기의 한복판에 서면서, 주주와 독자들의 비판 없는 한겨레는 언론으로서 존재할 의미가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그 비판엔 여전히 한겨레가 할 일이 있는 언론이라는 기대와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한 주주는 “한겨레는 주주들의 자부심이며 자존심이다. ‘엔번방’ ‘살아남은 김용균’처럼 최근 몇년간 나온 뛰어난 기사들을 모두 읽어는 봤냐”며 참석자들에게 주주 참여 매체 ‘한겨레온’을 활성화시켜 제대로 된 비판과 소통을 하자고 호소했다. 아버지의 창간주식을 물려받았다는 다른 주주는 “극심한 진영논리로 언론을 바라보는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새 가치를 던지는 한겨레 기사를 봐왔다. 어느 정치 권력의 편을 들어달라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할지를 중심으로 해달라”며 “창간주주 열정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기후변화 이슈나 소수자·소수정당 문제에 더 적극 나서달라는 목소리들도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한겨레의 민주주의는 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였다. 과거 주총에선 1천~2천명의 주주가 몇시간씩 토론을 벌였고, 때론 마이크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성이 오갔다. 주총 무효 소송이 제기된 해도 있었다. 하지만 매해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는 부모들도 적잖던 그 시기, 한겨레 주총은 감히 ‘새로운 민주주의 실험의 장’이라 할 수 있었다. 35년이 흐른 지금, 창간 당시 60%가 넘던 2030세대 주주 또한 나이가 들며 주총장을 찾는 청년·중년은 많이 줄었다. 선과 악의 대립이 분명했던 시대의 인식이 그대로 통용될 순 없음 또한 분명하다. 한겨레를 포함해 진영을 가리지 않는 ‘내로남불’은 우리 사회에 더 어려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3시간 가까운 주총에서 나온 33차례의 다양한 발언은 그 복잡한 현주소의 확인임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지금 한겨레가 ‘좋은 저널리즘’으로 본때 있게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절박한 질책이었다. 박현 뉴스룸국장은 권력 감시 강화와 정파를 가리지 않는 경중에 맞는 보도, 공판 중심의 법조 보도 변화 등을 약속했다. 권력이 오만할수록 부끄러움과 상식을 아는 시민들의 힘을 한겨레는 믿는다. 이날의 쇄신과 전환의 다짐이 이젠 연락처마저 알 수 없는 3만여 주주뿐 아니라 독자, 후원회원들 한명에게라도 더 가닿기를 바라며 여기 주총 보고를 쓴다. 그리하여 울퉁불퉁하더라도 한겨레와 주주·독자들이 함께 이 사회 길을 다시 내기를.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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