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대의에 죽는 것이 孝…일제, 오전 10시 안 의사 형 집행 이유는?”

입력 2023.03.29 (14:05) 수정 2023.03.29 (15:1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Dz4Jh5cvKL0


◇ 윤주성 앵커 (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오늘은 안녕 못 할 것 같습니다. 일제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 도를 넘는 것 같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참담한 시간이어서 그러는데요. 오늘은 3월 29일이잖아요. 26일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가장 뜨거운 독립운동가로 남아계신 분이 안중근 의사인데 일제에서 순국한 지 11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을 알고 있지만 안중근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셨는지, 왜 오전 10시에 교수형을 집행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지난 26일이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기였는데 한국인이 얼마나 안중근 의사를 좋아하는지 통계가 나와 있다고요?

◆ 노성태: 네. 국가보훈처가 최근 5년간 빅데이터 분석을 해봤는데요. 우리 국민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독립운동가가 누구냐 이렇게 조사를 했는데 압도적 1위가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였고 다음으로 김구 선생, 윤동주 시인, 유관순, 윤봉길 열사 이 순이었다고 합니다.

◇ 윤주성: 빅데이터의 압도적 1위 안중근 의사... 많은 사람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는데요.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또 저격 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 노성태: 1879년생이고요. 황해도 해주 출신입니다. 아버지 안태훈, 어머니 조 씨, 조마리아 여사 편지로도 유명하신 분인데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마지막 면회를 갔던 두 동생이 있습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안정근, 안공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지요.

◇ 윤주성: 안중근 의사가 처음부터 의병장이 되고 독립군 대장이 되는 등 무장투쟁론자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안중근은 본래 무장투쟁론자가 아닌 교육 운동에 앞장섰던 애국계몽운동가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해에 중국에 건너가서 중국의 더 큰 세상을 구경하고 있을 때 프랑스 신부 르 각 신부라고 하는 분을 만나게 되는데요. 안중근 의사는 아시다시피 천주교 신자 세례명이 토마스였잖아요. 그래서 애국계몽운동을 해야 된다 이렇게 신부로부터 교훈을 얻고 들어와서 진남포에 삼흥학교 그리고 돈의학교를 인수해서 교육을 통해서 힘을 기르는 애국계몽운동을 처음에 펼치게 됩니다.

◇ 윤주성: 평남에 있었군요. 평안남도 진남포군요. 안중근 의사하면 학교를 세운 교육자보다는 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장 이미지가 강한데요. 언제 연해주로 건너가서 의병장이 되는 것인가요?

◆ 노성태: 안중근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 1907년 아버지 친구 김 진사가 찾아옵니다. 김 진사라고 하는 분이 긴급한 시국에 촌구석에서 교육 사업에 전념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니 100만 명 넘는 조선인이 사는 연해주 간도 지역에 가서 현실적인 투쟁을 해야 된다 이렇게 안중근에게 조언을 하게 됩니다. 안중근은 1907년 두만강을 건넜고 북간도 권하천, 건너가서 의병 항쟁의 결심을 굳히게 되고 찾아간 곳이 연해주 연추였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연해주 연추에는 최재형,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부대 '동의회'를 조직했고 안중근은 그 '동의회' 우영장이 되어서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 진공작전을 여러 번 전개하게 되는데 한두 번은 성공했지만 마지막에는 큰 실패를 하게 됩니다.

◇ 윤주성: 국내 진공작전에 실패를 맛보는군요. 그래서 단지동맹을 했던 것인가요?

◆ 노성태: 그렇지요. 손가락을 잘라서 동지 12명과 함께 동맹을 맺은 것이 단지동맹인데요. 이 부분이 안중근 자서전에 다음처럼 나옵니다. "우리들이 전후에 전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어떤 일이든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것인 즉 오늘 우리는 손가락을 끊고 맹세를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겠소"하고 안중근 의사가 제안을 하니까 모두 따르겠다 해서 열두 사람이 왼손 약지를 끊어서 피로서 태극기 앞에, 아마 많이 보셨을 것이에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고 하는 글자를 쓰게 되는데 당시 비장했던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 윤주성: 단지동맹 결성 이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게 된 것이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안중근은 12명의 동지와 함께 단지동맹을 맺으면서 이렇게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침략 원흉 이토를 암살하기로 맹세하고 만약 3년 이내에 성사치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겠다, 대단한 맹세를 하게 되는데요.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던 안중근 의사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고 1909년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를 탑니다. 22일 저녁 하얼빈에 도착을 하고요. 운명의 날, 10월 26일 9시 30분, 이토가 러시아 재무대신이었던 코코프체프열차에서 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러 군중 쪽으로 오는 순간에 이토에게 세 발을 명중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역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역구원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말로 '꼬레 우라', 우리말로는 '대한국 만세'인데 이것을 외치다가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가 됩니다.

◇ 윤주성: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 다음에 안중근 의사는 어떻게 되나요?

◆ 노성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 근처 동청 철도국에서 한나절 붙잡혀 있다가 저녁 9시경에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가 됩니다.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방에서 안중근 의사는 일본 검찰로부터 이토를 격살했었던 이유에 대한 취조를 받았고 안 이사는 격살 이유 15가지를 당당하게 진술하게 되는데요. 대표적인 15가지 중에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면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그리고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 5조약, 정미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무고한 한국민들을 학살한 죄,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죄목을 적게 됩니다.

◇ 윤주성: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죄 15가지를 들며 저격을 했는데 일제는 당연히 인정을 안 했겠지요?

◆ 노성태: 인정을 안 했으니까, 했다고 한다면 무죄였겠지만 사형을 받잖아요. 그런데 일본 정부는 공판이 열리기도 전에 안중근의 범행은 매우 중대하고 흉악하니 극형에 처해야 된다고 뤼순 감옥에 전보를 쳐둔 상태였으니까 어찌 보면 안중근 사형은 이미 짜놓은 각본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리고 3월 26일 10시에 형이 집했됐으니까 113년이 된 것이지요.

◇ 윤주성: 사형이 선고되자 안중근 의사는 항소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라고요?

◆ 노성태: 어머니가 조마리아 여사인데 아들에게 편지를 쓰지요.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아라, 그리고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모두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이런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항소를 포기했는데 일본 신문에는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아들을 두고 일본의 아사이 신문에서는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 윤주성: 안중근 의사의 교수형 집행 시간이 10시라고 들었는데 이유가 있는 것인가요?

◆ 노성태: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은 시간이 1909년 9시 30분이었고 기차로 옮긴 뒤에 치료를 받았지만 30분 뒤인 10시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제가 이토가 숨졌던 10시 그 시간에 맞춰서 안 의사의 교수형을 집행한 것이니까 일종의 보복이었던 셈이지요.

◇ 윤주성: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무등의 아침] “대의에 죽는 것이 孝…일제, 오전 10시 안 의사 형 집행 이유는?”
    • 입력 2023-03-29 14:05:09
    • 수정2023-03-29 15:13:19
    광주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Dz4Jh5cvKL0


◇ 윤주성 앵커 (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오늘은 안녕 못 할 것 같습니다. 일제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 도를 넘는 것 같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참담한 시간이어서 그러는데요. 오늘은 3월 29일이잖아요. 26일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가장 뜨거운 독립운동가로 남아계신 분이 안중근 의사인데 일제에서 순국한 지 11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을 알고 있지만 안중근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셨는지, 왜 오전 10시에 교수형을 집행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지난 26일이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기였는데 한국인이 얼마나 안중근 의사를 좋아하는지 통계가 나와 있다고요?

◆ 노성태: 네. 국가보훈처가 최근 5년간 빅데이터 분석을 해봤는데요. 우리 국민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독립운동가가 누구냐 이렇게 조사를 했는데 압도적 1위가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였고 다음으로 김구 선생, 윤동주 시인, 유관순, 윤봉길 열사 이 순이었다고 합니다.

◇ 윤주성: 빅데이터의 압도적 1위 안중근 의사... 많은 사람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는데요.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또 저격 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 노성태: 1879년생이고요. 황해도 해주 출신입니다. 아버지 안태훈, 어머니 조 씨, 조마리아 여사 편지로도 유명하신 분인데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마지막 면회를 갔던 두 동생이 있습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안정근, 안공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지요.

◇ 윤주성: 안중근 의사가 처음부터 의병장이 되고 독립군 대장이 되는 등 무장투쟁론자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안중근은 본래 무장투쟁론자가 아닌 교육 운동에 앞장섰던 애국계몽운동가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해에 중국에 건너가서 중국의 더 큰 세상을 구경하고 있을 때 프랑스 신부 르 각 신부라고 하는 분을 만나게 되는데요. 안중근 의사는 아시다시피 천주교 신자 세례명이 토마스였잖아요. 그래서 애국계몽운동을 해야 된다 이렇게 신부로부터 교훈을 얻고 들어와서 진남포에 삼흥학교 그리고 돈의학교를 인수해서 교육을 통해서 힘을 기르는 애국계몽운동을 처음에 펼치게 됩니다.

◇ 윤주성: 평남에 있었군요. 평안남도 진남포군요. 안중근 의사하면 학교를 세운 교육자보다는 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장 이미지가 강한데요. 언제 연해주로 건너가서 의병장이 되는 것인가요?

◆ 노성태: 안중근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 1907년 아버지 친구 김 진사가 찾아옵니다. 김 진사라고 하는 분이 긴급한 시국에 촌구석에서 교육 사업에 전념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니 100만 명 넘는 조선인이 사는 연해주 간도 지역에 가서 현실적인 투쟁을 해야 된다 이렇게 안중근에게 조언을 하게 됩니다. 안중근은 1907년 두만강을 건넜고 북간도 권하천, 건너가서 의병 항쟁의 결심을 굳히게 되고 찾아간 곳이 연해주 연추였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연해주 연추에는 최재형,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부대 '동의회'를 조직했고 안중근은 그 '동의회' 우영장이 되어서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 진공작전을 여러 번 전개하게 되는데 한두 번은 성공했지만 마지막에는 큰 실패를 하게 됩니다.

◇ 윤주성: 국내 진공작전에 실패를 맛보는군요. 그래서 단지동맹을 했던 것인가요?

◆ 노성태: 그렇지요. 손가락을 잘라서 동지 12명과 함께 동맹을 맺은 것이 단지동맹인데요. 이 부분이 안중근 자서전에 다음처럼 나옵니다. "우리들이 전후에 전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어떤 일이든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것인 즉 오늘 우리는 손가락을 끊고 맹세를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겠소"하고 안중근 의사가 제안을 하니까 모두 따르겠다 해서 열두 사람이 왼손 약지를 끊어서 피로서 태극기 앞에, 아마 많이 보셨을 것이에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고 하는 글자를 쓰게 되는데 당시 비장했던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 윤주성: 단지동맹 결성 이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게 된 것이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안중근은 12명의 동지와 함께 단지동맹을 맺으면서 이렇게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침략 원흉 이토를 암살하기로 맹세하고 만약 3년 이내에 성사치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겠다, 대단한 맹세를 하게 되는데요.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던 안중근 의사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고 1909년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를 탑니다. 22일 저녁 하얼빈에 도착을 하고요. 운명의 날, 10월 26일 9시 30분, 이토가 러시아 재무대신이었던 코코프체프열차에서 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러 군중 쪽으로 오는 순간에 이토에게 세 발을 명중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역구원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말로 '꼬레 우라', 우리말로는 '대한국 만세'인데 이것을 외치다가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가 됩니다.

◇ 윤주성: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 다음에 안중근 의사는 어떻게 되나요?

◆ 노성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 근처 동청 철도국에서 한나절 붙잡혀 있다가 저녁 9시경에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가 됩니다.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방에서 안중근 의사는 일본 검찰로부터 이토를 격살했었던 이유에 대한 취조를 받았고 안 이사는 격살 이유 15가지를 당당하게 진술하게 되는데요. 대표적인 15가지 중에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면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그리고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 5조약, 정미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무고한 한국민들을 학살한 죄,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죄목을 적게 됩니다.

◇ 윤주성: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죄 15가지를 들며 저격을 했는데 일제는 당연히 인정을 안 했겠지요?

◆ 노성태: 인정을 안 했으니까, 했다고 한다면 무죄였겠지만 사형을 받잖아요. 그런데 일본 정부는 공판이 열리기도 전에 안중근의 범행은 매우 중대하고 흉악하니 극형에 처해야 된다고 뤼순 감옥에 전보를 쳐둔 상태였으니까 어찌 보면 안중근 사형은 이미 짜놓은 각본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리고 3월 26일 10시에 형이 집했됐으니까 113년이 된 것이지요.

◇ 윤주성: 사형이 선고되자 안중근 의사는 항소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라고요?

◆ 노성태: 어머니가 조마리아 여사인데 아들에게 편지를 쓰지요.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아라, 그리고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모두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이런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항소를 포기했는데 일본 신문에는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아들을 두고 일본의 아사이 신문에서는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 윤주성: 안중근 의사의 교수형 집행 시간이 10시라고 들었는데 이유가 있는 것인가요?

◆ 노성태: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은 시간이 1909년 9시 30분이었고 기차로 옮긴 뒤에 치료를 받았지만 30분 뒤인 10시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제가 이토가 숨졌던 10시 그 시간에 맞춰서 안 의사의 교수형을 집행한 것이니까 일종의 보복이었던 셈이지요.

◇ 윤주성: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광주-주요뉴스

더보기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