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100년이 넘는 병천의 두 교회

이승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입력 2023. 3. 2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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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1919년 3월 13일, 서울에서 내려온 유관순으로부터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접한 김구응은 유관순에게 태극기 제작과 인근 고을 유지와의 연락 업무를 맡겼다. 이후 유관순의 매봉산 봉화를 시작으로 4월 1일 오후 1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군중의 수가 3000명 혹은 5000명에 달했다고도 한다. 맨 앞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김구응은 일본군의 총칼에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으며, 자식의 시체를 안고 항거하던 그의 어머니마저도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한 사건이 아우내 만세운동이다. 지금 병천의 인구는 6000여 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군중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히 상상된다. 아우내 만세운동의 배경엔 병천의 두 교회가 있다. 1898년 미국 감리교가 설립한 매봉교회와 1906년 영국 성공회가 세운 병천교회다. 병천교회는 지금의 병천순대거리와 인접해 있고 매봉교회는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김구응은 병천교회가 운영하던 진명학교의 교사였으며, 그곳에서 유관순의 친오빠를 가르치기도 했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종권은 흥호학교를 운영하며 신학문을 적극 수용했다. 병천은 교회와 학교를 통한 신문물의 전파와 당대의 정보가 빠르게 모이는 장터,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지역성이 하나가 돼 아우내 만세운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매봉산 아래에 자리하는 매봉교회는 1967년 이화여고가 세운 유관순기념교회를 1997년에 헐고 새롭게 세운 교회다. 지하 1층에 지상 2층으로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적벽돌로 마감했다. 내부 강단부를 향해 점점 높아지는 단면은 정면의 나무십자가를 향하고 있다. 벽체와 지붕 사이를 띄어 전통목조건물의 공포방식으로 목재트러스를 받쳐 그 사이로 빛을 도입해 공간감을 더했다. 또한 2층에 배치된 예배당은 지붕과 벽체 사이로 유입되는 빛의 양을 조절해 성과 속의 공간구분을 시도했다. 목재트러스와 철근콘크리트벽체는 빛과 색채의 조화로 거룩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교회와 담을 같이하며 ㄱ자 형태로 작은 초가집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유관순의 생가다.

성공회 병천교회는 1906년 토지매입을 시작으로 1908년에서야 교회와 학교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선교 초기엔 지역 유지인 정관서의 집을 예배 장소로 활용했으며 1921년에서야 병천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한옥교회를 신축했다. 병천 유지 전택서가 사재를 들여 조선후기 실학자인 홍대용의 99칸 기와집을 구입하고 각종 자재를 사용해 교회를 신축했다. 병천교회와 진명학교의 전신은 이러했다. 진명학교에서 1919년 3월 김구응과 유관순의 만남이 있었고 4월 1일의 아우내 만세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로도 교회는 77년 동안 병천 지역의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1970년에 교회 부지에 한화그룹의 도움으로 성모의원을, 1979년 진명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선교, 의료, 교육을 통한 지역봉사는 계속됐다. 1921년 지은 한옥교회는 심한 누수와 냉난방 그리고 건축자재의 훼손으로 성전 건축을 결의하고 교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됐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지하 1층과 지상 2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약 150석 규모의 예배당은 외부의 빛을 제단으로 끌어들여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빛에 드러나도록 설계되었다. 이전 한옥교회에 사용된 홍대용 대감댁의 주춧돌은 교회의 화단에 그대로 남아 있다.

병천교회는 1908년 같은 시기에 북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외길의 막다른 동네 봉항리에도 지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그 후 1933년 홍대용 대감댁의 남은 건축자재를 사용했다. 봉항1리 마을 뒤쪽에 자리한 교회 북쪽에 출입구가, 남쪽에 십자가와 제단이 있다. 지붕은 2고주 7량 형식으로 천정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다. 지붕이 금속기와로 바뀌었고 내부의 십자가와 대들보엔 1933년 상량식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 신축 당시 한옥교회가 가지는 봉항리교회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느껴진다. 지금은 100년의 영광보단 100년의 세월로 건물 전체가 우측으로 기울고 잡초가 우거진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친 신앙공동체와 교육공동체로서의 가치는 비할 바 없을 것이다. 봉항리교회를 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하고자 하는 연구용역이 진행된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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