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알아야 할 임진왜란의 ‘블랙스완’ [역사 속 경제이야기]

이도형 2023. 3. 29. 07: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 경제이야기 ⑥
경제는 결국 사람 심리를 통해 결정된다. 사람이 경제를 만들고, 사람이 경제를 무너뜨린다. 그렇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지금의 경제라 할지라도, 반복되는 과거 역사 속 사람의 행보를 되짚어보면 한층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역사 속 경제이야기>는 역사를 뒤흔든 사건과 그 사건의 주인공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경제 현상’의 통찰을 얻는 시리즈다.
 
1592년 4월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초반 조선은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의주까지 도망가는 등 큰 패배를 당했다. 흔히 동·서인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에 몰두한 조선 지도층이 패배의 이유로 여겨진다.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지 않았다는 인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온 사신들이 당파에 따라 침략 가능성을 달리 보았다는 기록 때문에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나 전쟁 발발 한 달여만에 서울에서 도망간 국왕 선조 등이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한다. 

국왕 앞에서 침략 가능성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는 조선 사신단이 일본에 간 건 전쟁 2년 전인 1590년이었다. 국왕 선조는 다음 해엔 1591년엔 정읍현감 이순신을 8단계나 끌어올려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전쟁 발발 3년 전인 1589년. 이순신은 조선 조정이 추린 ‘불차 채용’, 즉 특별 승진 대상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이순신을 추천한 사람은 병조(현재의 국방부) 경력이 풍부했던 이산해와 정언신이었다. 이순신의 고속 승진은 친구 류성룡의 적극 천거나 선조의 고집 때문만은 아니다. 

임진왜란 초기 전투 기록 임진왜란 개전 초기 동래성에서의 전투를 담은 ‘동래부순절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죽고, 다치면서 의학서의 필요성은 그만큼 컸다.
말하자면 일찌감치 조선 조정과 국왕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했다. 그랬기에 특별 승진 대상 무신을 뽑아 놓았고 일본 정탐을 위해 사신을 보냈으며 침략이 다가온다고 판단되자 선별한 무신들을 전방에 내려보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은 속절없이 일본에 밀렸던 걸까. 1589년. 국왕 선조는 신하들과 회의 중 변협에게 “일본군이 수 만명 올 가능성이 있을까”라고 물었다. 1555년 을묘왜변 때 일본군과 싸웠던 변협은 “일본의 배는 크기가 작아 한 번에 100명 정도밖에 타지 않으니 1만 명 정도일 것”이라고 답했다. 

이것이 전쟁 초반 조선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였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했다. 그런데 ‘얼마나’ 쳐들어올지에 대해서는 과거 경험에 부쳐 ‘수 만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과 직접 싸운 신하도 “만 명을 넘지 못한다”고 예측하는데 ‘1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생각을 떠오르기란 쉽지 않다. 이를 토대로 방위대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 더더욱. 정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이 넘는 대군을 부산에 상륙시켰다.

‘수만 명 정도일 것’이라는 생각은 임진왜란 전에는 합리적인 주장이었다. 아니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컸다. 선조는 임진왜란 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책임자에 윤선각. 김수. 이광을 임명한 뒤 이들에게 성곽을 보수하고 참호를 파게 했다. 실록은 이들이 너무나 열심히 일하는 바람에 지역주민들의 원망이 컸다고 기록했다. 중장비가 없다보니 성벽 수리나 참호 파기엔 백성들이 무보수로 동원됐기 때문이다. 특히 경상도 책임자인 김수는 유생도 공사에 참여시킬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큰 경계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수 만명 침략에 대비한 방어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는 ‘힘들게 왜 성을 쌓느냐’는 반박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류성룡에 한 지방 유력자가 ”부산 앞은 망망대해인데 일본군이 어떻게 넓은 바다를 넘어오겠느냐”는 항의성 편지가 오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그럼에도 방어 준비를 이어갔지만 끝내 ‘10만 명 이상’을 대비한 조치는 쉽게 하지 못했다. 조선 수군 중 가장 많은 함대를 보유한 경상우수사 원균은 상상외로 쏟아진 일본군 부대에 군영을 불태웠다. 

조선 조정은 커질 것이 분명한 항의를 누를만한 정치력이 없었고, 일본군의 정확한 규모를 알아낸 정보도 없었다. 그러니 결국 조선 조정은 자신들의 경험 내에서 판단했다. 조선 입장에서 십만이 넘는 일본군의 상륙은 말하자면, ‘블랙스완’. 즉 예상을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 지도부의 한계는 예상을 뛰어넘는 일본의 침략을 ‘경험’과 ‘인식’을 통해서만 본 것에 있었다. 

검은(黑) 백조(白鳥). ‘블랙스완’은 평소 상식이라면 생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난 걸 뜻한다. 원래는 철학, 사회학 등에 쓰이던 표현인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 나심 탈레브라는 학자가 위기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영역이 금융으로도 확장됐다. 이후에도 금융 시장에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 ‘블랙스완’은 종종 소환되곤 한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2023년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불거진 전 세계 금융권 불안현상은 이 ‘블랙스완’에 해당할까. 지난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연준)의 공격적 금리 인상 후. 금융권이 쉽지 않은 상황에 부닥칠 것이라는 예상은 학계나 업계 내부에서 꾸준히 나오던 목소리였다. 즉. 이번 불안 사태는 예상 범주 안에 있다. 

이번 불안 사태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현재로써는 예측하기 어렵다. SVB 파산은 유럽 주요 은행인 크레디스위스(CS)의 부실 우려로 이어졌고 결국 CS는 스위스 UBS에 합병됐다. 그 과정에서 불거진 불똥은 도이치방크 등 다른 은행에 대한 불안으로 번졌다.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가 “도이치방크는 안전하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투자자들의 불안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불안이 ‘블랙스완’으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국 금융 당국이 계속해 “우리 금융은 안전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블랙스완’으로 바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노력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4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SVB 파산 사태와 같은 위험이라든가 똑같은 취약점으로 인한 상황이 국내에 발생할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CS 사태의 불똥이 된 ‘코코본드’ 상각 사태와 관련, 국내 금융 시장의 코코본드는 CS 상각 조건과 달라 유사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 또 금융 당국이 현재 상황을 위험으로 판단하고 대응하는 순간. 시장이 진짜 위험이라고 보고 더 크게 반응할 수도 있다. 시장은 지금, ‘위험’과 ‘안전’을 종잇장 차이로 보고 있다. 금융 당국의 대응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순간의 판단이 시장에 불을 지를 수 있다.

이럴 때 중요한 판단 근거는 ‘경험과 인식’이 아닌, 현재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 그리고 빠른 정보 습득이어야 한다. 시장 상황은 시시각각 변한다. SVB 파산 원인 중 하나는 진화된 금융 시스템으로 과거와 달리 몇 시간 만에도 가능해진 ‘뱅크런(예금 대량인출)’에 있다. 한국 경제. 금융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막연한 공포 심리가 휘몰아친 ‘토스뱅크’ 사태에서도 변화된 금융환경이 엿보인다. 토스뱅크가 내놓은 선이자 예금을 놓고 유동성 불안에 따른 대응 아니냐는 소문이 돌자 토스뱅크는 유동성 위기 대응 지표 중 하나인 유동성 커버리지비율(LCR)이 현재 833.5%로 규제비율인 90%의 9배라고 진화에 나섰다. 

금융 당국의 조처에 ’냉철함’이 있어야 하는 건, 지금 한국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2금융권을 중심으로 급증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권 내에서는 4월 이후 PF 대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다. ‘경험’과 ‘인식’을 통해 현재의 금융 시장이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추경호 부총리의 언급처럼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총력을 다해야 하는 때”(24일 전문가 간담회)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