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탄’의 아버지 고행석 작가 “만화는 제 인생… 만화방은 사라졌지만 웹툰 도전해볼 것” [마이 라이프]

엄형준 2023. 3. 29. 06: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본소 3대 스타 만화가
긴 무명 시절 거친 뒤 1981년 낸 데뷔작
출판해주는 곳 없어 보따리상에 팔아
‘죽작가’ 불리며 설움과 망신 많이 당해
3년 뒤 ‘요절복통 불청객’ 내면서 대박
노작가의 회한과 열정
비디오에 밀려 2010년대 만화방 사라져
어렵다고 성인만화 손 댄 것 가장 후회
최근 ‘굴뚝새’ 등 전성기 작품 세편 복간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펜 잡아
10대와 20대를 아우르는 ‘Z세대’에겐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아저씨일지 모르지만 1980년대 대본소로 불리던 만화방을 들락날락하던 40세 이상의 세대, 그러니까 ‘X세대’나 ‘베이비부머’에게 ‘구영탄’의 아버지 고행석은 웹툰작가인 박태준이나 야옹이작가, 기안84만큼 유명했던 만화가다.
고행석 작가가 지난 16일 서울 강서구 작업실에서 태블릿을 이용해 만화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그가 전성기에 그려낸 ‘굴뚝새’ 등 대표 작품 세 편이 최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복간에 성공하면서, 이현세, 박봉성과 함께 대본소 3대 스타 만화가로 불린 노작가의 근황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16일 찾아간 서울 강서구의 작업실은 마치 1980년대의 만화방을 재현한 듯했다. 검은색이나 갈색 시트지로 마감한 책꽂이에는 만화책이 가득 꽂혀 있고, 가끔 라면이나 자장면을 끓여 먹거나 쥐포를 구울 듯한 버너 부탄가스통도 보인다. 과거의 여느 만화방과 다른 점이라면 책꽂이에 꽂힌 대부분의 책이 그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제가 한 500편 정도 그렸는데, 편당 10권이라고 하면 5000권 정도를 내지 않았나 싶네요.”

전성기 때는 한 달에 많게는 25권 정도의 신간을 냈다고 한다. 혼자 모든 작업을 한 건 아니고 많을 때는 ‘새끼작가’로도 불린 70명 정도의 문하생을 뒀다.
수요도 많았고, 주변에선 “메뚜기도 한철”이라며 신간을 빨리 찍어내라고 부추겼다. 그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작가는 만화를 판 돈으로 서울에 연립주택을 마련했을 때가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방 세 개짜리 연립주택이 1000만원이었어요.”

그가 유명해진 계기가 된 ‘요절복통 불청객’이 1983년 만화방에 깔린 후 한 출판사는 자사와의 거래를 조건으로 계약금 900만원을 제시했다고 한다.

남들이 보기엔 갑자기 찾아온 ‘로또’ 같은 출세였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노력과 고난의 시절이 있었다. 고교를 나와 군 생활을 마친 후 스물여섯에 서울로 상경, 약 10년간 문하생 생활을 한 뒤 3년의 무명 시절까지 거친 이후였다.

그의 데뷔작은 1981년 ‘아빠 아빠 우리 아빠’로 아무 데도 출판해 주는 곳이 없어 이틀을 돌다 동대문 보따리상에게 20만원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다섯살 난 첫째 아들에게 통닭을 사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그렇게라도 만화를 넘겨야 했다.

“요절복통 불청객이 나오기 전에는 출판사에 가면 사장이 ‘당신만 하나도 안 팔린다. 이번에는 얼마를 손해 봤다’ 그러는 거예요. 한번은 사장이 모인 작가들에게 ‘점심 같이 먹으러 갑시다’ 하면서 어깨를 두드리는데 나만 건너뛰고 가는 거예요. 그때 진짜 당황스럽고 망신스럽고 그랬어요.”

작품이 안 팔리는 ‘죽작가’(‘죽 쑤는 작가’ 뜻으로 추정)로 불리던 그가 만화 판 돈으로 집을 샀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가 만화가를 꿈꾼 건 초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그때 제가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선생님이 ‘만화가는 왜’라고 묻기에, 당황스러워서 ‘돈 많이 벌려고요’라고 했죠.”

진짜로 그렇게 됐다.

그는 ‘식객’, ‘타짜’ 등을 그린 허영만 작가와도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다. 허 작가가 그에게 만화를 그리라고 추천했다는 풍문도 있다.

“그건 아니고요, 어릴 적에 허영만이 제 친구의 친구였는데, 처음 제가 만화 그릴 땐 (허 작가가) 공부해야지 그런 거 왜 그리냐고 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집에 가보니까 만화를 잔뜩 그려놨더라고요.”

먼저 서울로 상경한 허 작가가 그를 문하생으로 추천한 건 맞는다고 했다.

고 작가는 요절복통 불청객 이후, 요절복통 시리즈와 이번에 시공사를 통해 복간된 굴뚝새, ‘폭풍열차’, ‘마법사의 아들 코리’ 3편, 그리고 ‘전설의 야구왕’ 등 다양한 작품을 히트시켰다.

마법사의 아들 코리는 그릴 때부터 만화영화를 염두에 둔 작품으로 실제 TV에서 방영됐고, 굴뚝새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만화잡지에 연재도 했는데, 전설의 야구왕이 일본 만화 ‘드래곤볼’을 인기투표에서 누르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잡지 페이지당 원고료는 10만원으로 당시 최고 대우였다고 한다.

“원양어선을 탔다가 돌아왔더니 결혼 약속을 했던 여자가 딴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친구가 있었어요. 이 친구가 착한 것인지 사랑을 했는지, 그 아기를 그렇게 이뻐하고 남편하고 친구까지 되더라고요. 그걸 만화로 그렸는데 그게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봐요.”

그의 작품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인물은 흐리멍덩한 눈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인정받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주인공 구영탄과 도도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영탄을 구박하다가 때론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박은하라는 여성이다.

주제와 소재가 엄연히 다름에도 두 인물을 만화에서 반복적으로 그려낸 건 한 작가가 하나의 캐릭터를 그리는 게 당연시됐던 당시 만화계의 관습 때문이었다고 한다.

흐리멍덩한 구영탄의 눈은 다혈질인 그의 성격과 반대고, 진취적인 은하는 그의 이상형에 가깝다.

“제가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편안한 (느낌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어요. 은하는 여동생 친구 이름이었을 거예요. 정순이, 정숙이가 많은 시절에 참 이쁜 이름이었거든요. 그 시대에 맞지 않게 조금 과감하고 왈가닥으로 여자 독자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었죠.”
최근 크라우드 펀딩 성공으로 시공사를 통해 ‘굴뚝새’(왼쪽부터)와 ‘폭풍열차’·‘마법사의 아들 코리’가 복간됐다.
그가 그린 수많은 만화 중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은 이번에 복간된 폭풍열차다(출판사 측은 굴뚝새를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영탄은 유망한 권투선수였지만 상대 선수가 자신의 주먹에 턱을 맞아 죽자, 이후 얼굴을 때리지 못하는 반푼이 복서로 전락한다. 워낙 까칠한 성격이었던 터라 복싱계에서 추방당하고, 아내 은하는 집을 나갔다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오지 않는다.

홀로 아이를 키우던 영탄은 아내의 소식을 알게 되지만 은하는 기억을 되찾고도 가난이 두려워 영탄과 어린 딸을 모른 척한다. 그러다 병원비가 없어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그는 복서로 재기해 은하와 세상에 복수하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는 그의 삶이 일부 투영돼 있다. 집에 통닭 사 갈 돈이 없어 고생하던 시절, 까칠한 성격으로 인한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갈등, 그리고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설정 등이 그렇다.

고 작가의 캐릭터는 가지와라 잇키 원작에 지바 데쓰야가 그림을 그린 일본 만화인 ‘내일의 죠’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권투를 자주 그리고, 구영탄의 머리 스타일이 뾰족한 것도 그렇다. 스타일은 비슷하지만 그는 한국적 정서와 독창적 이야기를 더해 자신의 만화를 만들었다.
특히 친구 훈이의 죽음 뒤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영탄을 그린 굴뚝새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긴다. 이 만화를 짧은 문장으로 요약하긴 어렵다.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게 마련일까. 시대의 변화는 그에겐 위기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테이프와 성인만화를 빌려주는 비디오방이 동네에 우후죽순 들어섰다. 비디오방 역시 영화관 부흥과 CD, 케이블TV 등에 밀려 결국 사라졌지만, 당시 비디오방의 등장으로 만화방은 직격탄을 맞았다.

한때 전국에 1만5000개가량 있었던 대본소라 불린 만화방은 하나둘 줄기 시작해 2010년대 후반 자취를 감췄다. 현재도 만화방이나 만화카페가 존재하긴 하지만, 과거 라면 먹고 담배 피우던 시절의 만화방과는 성격이 다르다. 책도 한국의 대본소 만화에서 지금은 일본 만화로 거의 대체됐다.

너무 많은 작품을 공산품처럼 찍어낸 것도 내리막의 원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1980년대엔 (인기) 작가라고 안 하고 공장장이라고 불렀어요. 후배 작가들은 우리가 다작하니까 들어설 자리가 없다며 우리를 저주했죠…. 다작을 하다 보니까 형편없는 작품들이 막 쏟아지고 인기도 추락을 했죠.”

1990년대 후반쯤엔 남아 있는 대본소 만화가 22명 중 21등까지 순위가 떨어져본 적도 있다고 한다. 많았던 문하생은 하나둘 빠져나갔고, 책을 내도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만화방이 사라질 때까지 억척스럽게 버텼다.
“(가장) 후회되는 건 성인만화를 그리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려서 구영탄의 이미지도 버려 버리고, 이름에 먹칠한 거.”

그의 말엔 아쉬움과 회한이 스며 있지만, 그의 전성기 작품은 여전히 빛난다. 그의 만화 속 주인공인 구영탄은 늙지 않은 채 한과 꿈, 희망과 좌절의 이야기로 때론 가슴 벅찬 감동을, 때론 눈물을 부른다.

비록 그의 대본소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만화에 대한 열정만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고 작가는 과거의 영광은 뒤로하고, 새롭게 밑바닥부터 다시 웹툰에 도전하고 있다.

이제는 “제가 젊은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면서 “웹툰작가로 데뷔 좀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해 웹툰 작품을 준비했다가 주변 반응이 미적지근해 접었다는 그는 지금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다. “만화는 제 인생이고 모든 거예요.” 일평생을 만화와 함께해온 그는 펜을 들 수 있는 한 만화를 그릴 모양이다.

고행석 작가는… ●1948년 전남 광양 출생 ●1981년 만화가 데뷔(아빠 아빠 우리 아빠) ●요절복통 불청객, 굴뚝새, 폭풍열차, 마법사의 아들 코리, 전설의 야구왕 등 창작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