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년 역사의 은행이 무너졌다…”은행은 어떻게 망하는가?” [이정흔의 쉬운 경제]

입력 2023. 3. 2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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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위기로 UBS에 인수된 CS…그린실캐피털, 아고케스 마진콜 등 투자 실패로 ‘신뢰 훼손’ 결정타

[이정흔의 쉬운 경제] 


2014년 ‘전 세계 부자들의 금고’로 명성이 높은 스위스의 프라이빗뱅킹(PB) 시스템을 취재하기 위해 스위스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금융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취리히 파라데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사보이호텔을 가운데 둔 스위스의 양대 은행 UBS와 크레딧스위스(CS)였습니다. 이 두 건물은 UBS와 CS를 가장 대표하는 건물이지만 본사는 아닙니다. 인터내셔널 PB센터입니다. 바로 ‘해외 고객들만을 위한 특화된 지점’으로서의 상징성이 큰 건물들이죠.

두 은행 사이에 호텔이 자리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스위스 PB 산업의 역사는 무려 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유대인 자산가들은 중립국인 스위스로 피란을 오기 시작했고 그때 유대인들의 대부분이 머무르던 호텔을 중심으로 스위스의 PB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세계 부자들의 금고’가 무너졌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여파로 CS의 유동성 위기가 불거졌고 글로벌 금융 시장이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이에 스위스 최대 금융회사인 UBS가 32억 달러에 CS를 인수하며 ‘급한 불’ 끄기에 나선 것입니다. 스위스 정부까지 나서 CS를 인수하는 UBS에 90억 스위스 프랑을 제공하기로 하며 ‘급한 불’ 끄는 데는 일단 성공한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UBS의 CS 인수 딜이 ‘구해 내지 못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전 세계 부자들의 금고’로서 스위스 은행들이 지금까지 쌓아 온 명성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 신뢰를 바탕으로 성장한 스위스 은행 산업

은행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산업입니다. 역사 최초의 은행은 기원전 2000년께 인도 수메르 지역의 상인들로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상인들은 농부들에게 고물 대출을 제공하는가 하면 여러 도시를 떠돌며 상품을 운반하던 상인들에게도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주고 자산을 보관할 장소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 시대에는 사원에 기반을 둔 대금업자가 대출을 하고 예금을 받고 환전을 수행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경제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은행 시스템의 뿌리를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찾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은행은 1937년 지오반니 메디치가 설립한 ‘메디치 은행’입니다. 당시 권력의 정점이었던 교황청을 고객으로 뒀을 정도였죠. 이렇듯 은행은 최초의 ‘통화’가 발행되고 부유한 사람들이 돈을 보관할 안정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때로는 무역을 촉진하고 부를 분배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 금융 시스템으로서의 역할을 도맡기도 했죠.

‘부유한 사람들이 돈을 보관하는 장소’인 은행이 위기를 맞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돈을 보관할 안전한 장소’라는 신뢰가 흔들릴 때입니다. 세계은행(The world bank)은 은행이 노출될 수 있는 다양한 위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 가치가 감소하면 은행은 고객들의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거나 은행이 투자한 기업들이 파산하게 되면 은행의 자산 가치가 악화될 수 있죠. 신용 위험입니다. 또한 이자율 상승에 따라 은행이 보유한 채권의 가치가 감소할 때도 은행은 위기를 맞습니다. 채권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면 은행의 부채가 자산보다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자율 위험입니다. 마지막으로 은행 고객들의 자금 인출이 은행이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을 넘어설 때가 있습니다. 유동성 위기입니다. 유동성 위기가 불거지면 '뱅크런'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더 빠른 속도로 고객들이 은행 자금을 인출하며 은행은 겉잡을 수 있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용 위험, 유동성 위험, 이자율 위험 등 용어는 저마다 다르지만 이 모든 위험들은 결국 하나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은행이 고객들의 자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무너질 때 은행은 몰락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행으로서 이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사실 스위스입니다. 스위스에서 PB 산업이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융성할 수 있었던 데도 ‘은행 비밀주의’의 영향이 컸습니다. 1934년 스위스 정부가 제정한 ‘은행비밀법’입니다. 스위스 은행에 10만 프랑 이상 예치한 예금주라면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로 된 계좌만으로 입출금이나 거래 명세서 작성이 가능하도록 했었죠. 전 세계 부자들이 망설임없이 스위스 은행을 ‘금고’로 삼았던 배경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라는 명성의 시작이었습니다.

2014년 스위스 PB 산업을 취재하며 30년 경력의 PB와 스위스은행연합회(SBA) 관계자 등을 만났습니다. 당시 스위스의 금융 산업은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스위스의 역외 자산은 각국 정부의 타깃이 됐습니다. 2009년 UBS가 미국 정부에 탈세 혐의가 있는 미국 예금주 4450명의 정보를 넘긴 것을 시작으로 스위스 PB 산업을 성장시켜 온 핵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은행 비밀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위기를 극복할 그들의 타개책은 역시나 바로 이 ‘은행 비밀주의’, 다시 말해 고객과의 신뢰였습니다. 취재 당시 만났던 UBS인터내셔널 PB센터의 한 직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행 비밀주의가 흔들리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고객들이 우리를 찾는 이유는 바로 이 ‘비밀주의’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고객의 정보를 다른 누구에게 쉽게 노출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로서의 신뢰를 지켜 내는 것이 세계 최고의 은행으로서 명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167년 역사의 CS, 이미 오래전 시작된 균열

신뢰를 쌓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167년 CS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의미가 남다릅니다. CS의 시작은 1856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위스 철도 시스템 개발을 위한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설립된 은행입니다. 스위스의 전력망과 유럽 철도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대출을 제공하며 성장했고 1900년대에는 소매 금융에도 진출했습니다. 1988년 미국의 투자은행인 퍼스트보스턴 인수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여러 금융회사를 인수하며 규모를 키웠습니다. 전 세계 초대형 투자은행의 상징인 9개 벌지 브래킷(bulge bracket)의 일원으로서 명성 또한 높았습니다.

하지만 167년 동안 쌓아 온 은행의 신뢰가 무너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작은 2021년 영국 핀테크 업체 그린실캐피털과 한국계 미국인 투자자 빌 황의 아케고스캐피털에 대한 투자 실패였습니다.

그린실캐피털은 온라인으로 일종의 외상 매출 채권을 할인해 주는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납품업자에게 납품 과정에서 필요한 돈의 일부를 빌려주고 고객사가 물건을 판 돈으로 채권을 회수하는 구조입니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가 투자하고 창업자가 영국 여왕 훈장까지 받은 잘나가는 스타트업이었죠.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기업들이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부실이 발생했고 2021년 3월 초 파산 신청을 하기에 이릅니다. CS는 이곳에 투자하는 펀드를 대거 판매했고 17억 달러 규모의 막대한 투자 손실을 봤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부자들을 위한 자산 관리의 강자’라는 명성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됐다는 겁니다.

그린실캐피털 사태가 불거진 지 불과 3주 뒤 CS의 신뢰를 뒤흔드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빌 황의 아게코스 마진콜 사태입니다. 한국계 유명 펀드매니저인 빌 황은 소위 ‘투자 천재’로 통했습니다. 그 빌 황이 이끌던 패밀리오피스 ‘아케고스’는 CS 외에도 골드만삭스·노무라 등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의 자금을 끌어와 무려 500억 달러를 굴리는 큰손이 됐습니다. 아케고스는 확신이 있는 한 종목에 5~10배 정도의 과감한 레버리지를 일으켜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금융 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아케고스에서 집중적으로 투자했던 한 회사의 주가가 폭락하며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투자은행들이 아케고스에 담보로 제공한 담보가치가 마진콜(증거금 추가 납입) 상황을 맞았고 결국 디폴트(채무 상환 불이행)를 선언하게 됐죠. 문제는 당시 JP모간이나 모간스탠리 등은 담보로 잡고 있던 주식을 블록딜로 처분해 손실을 최소화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CS는 뒤늦은 대처로 55억 달러의 손실을 보게 됩니다. 글로벌 금융회사 중 가장 큰 손실이었습니다. CS의 신용도에 직격탄이 됐죠.

이후에도 CS는 탈세와 마약상 돈세탁, 세금 사기 등 여러 차례 스캔들에 휘말렸습니다. ‘비밀주의’를 자산으로 한 세계 최고 은행으로서의 명성이 훼손되면서 수익이 감소하는 등 경영에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해 4분기에만 1100억 스위스 프랑(약 155조8500억원)에 달하는 고객 자금이 빠져 나갔습니다. CS의 유동성 위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지난 3월 10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소식이 전해졌고 글로벌 금융 시장은 요동쳤습니다.

결정타가 된 것은 최대 주주인 사우디아라비아 국립은행의 ‘유동성 추가 지원 계획이 없다’는 발표였습니다. 최근 공개된 CS 사업 보고서에 내부 통제 미흡 등 회계상 ‘중대한 결함’이 발견된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시장은 패닉에 빠졌고 고객들의 자금 이탈이 본격화됐습니다. 하루 평균 100억 달러(약 13조1000억원)씩 뱅크런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CS는 결국 167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됐고 더 이상 ‘고객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됐습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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