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11> 통영 음식 유곽과 너물비빔밥

최원준 시인 · 음식문화칼럼니스트 2023. 3. 2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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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제 개조개 구이 제철 나물 비빔밥…통영 바다와 육지 현란한 맛의 변주

# 귀한 날에 즐기던 유곽

- 조개살 잘게 다져 살짝 볶은 뒤
- 달걀·밀가루·된장·양념 버무려
- 석쇠 노릇노릇 구워내면 별미

# 민초들 소울메이트 ‘너물밥’

- 산나물·해조류 가득 담아내고
- 조개 육수도 곁들여 슥슥 비벼
- 반주 걸치기도 좋은 한끼 밥상

통영을 흔히 ‘미식의 도시’라고 말들 한다. ‘미식 도시’의 요건이라면 제대로 된 그 지역의 역사를 품은 전통음식이, 그곳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으며, 오래도록 전승되고 있는지를 판단근거로 삼을 수 있겠다. 그 음식의 근간에 격조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고, 다른 지역에서도 그 지역 정체성을 담은 음식으로 인정할 정도의 맛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렇게 본다면 통영은 미식의 도시라 할 여러 가지를 충족하는 곳이다. 통영은 잘 알다시피 조선 시대 남해의 영토·영해를 수호하고 담당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곳이다. 그렇기에 통제사를 비롯하여 고위 장수나 관리들은 중앙정부, 관리와 교류가 잦았다. 이 때문에 다양한 궁중음식이 민간으로 전해지면서 통영 음식은 대체로 화려하면서도 정갈하고 품격이 있다.

게다가 청정 바다에서 건져낸 풍부한 해산물, 해풍을 맞아 독특한 맛을 내는 나물 등이 지천이라, 음식에 갖은 신선한 식재료를 아낌없이 넣고 넉넉하게 조리해내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음식 하나하나의 맛깔이 저마다 살아있고, 음식 종류도 셀 수 없이 많을뿐더러 음식의 맛 또한 깊고 그윽함을 제대로 담아낸다.

통영의 전통 음식인 ‘유곽’(왼쪽 사진), ‘너물’(나물)이 대접에 정갈하게 담겼다. 여기에 밥을 곁들이면 너물밥이다.


▮기품 있고 단정하여라

예향 통영에서 수많은 예술가가 명멸하면서, 그 음식으로 도도한 풍류를 즐겼다. 통영 예술인과 교류가 넓었던 고(故) 제옥례 선생의 전언에 따르면, 청마 유치환 시인은 맛이 잘 든 ‘볼락김치’와 ‘톳나물’을 즐겼고, 대여 김춘수 시인은 귀빈 접대용의 고급 요리 ‘방풍탕평채’를, 박경리 작가는 ‘가자미찜’과 ‘미역무침’, 김용익 소설가는 통영 사람들이 평소 즐기는 ‘너물비빔밥과 멍게비빔밥’을 좋아했단다. 이렇듯 제대로 맛이 든 다양한 음식이 통영을 채우고 이를 예술가들이 통영 사람과 더불어 먹어온 것이다.

그중 통영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으로 조선 시대 통제영 밥상에도 올라갔던 ‘유곽’이 있다. 일명 대합으로도 불리는 개조개로 만든 음식으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개조개를 칼로 잘게 다져 살짝 볶은 뒤 달걀 밀가루 된장 고추장 다진 마늘과 파 고추 등 갖은양념을 섞어 잘 버무린 뒤, 조개껍데기 안에 참기름을 바르고 속을 채워 석쇠 불에 구워내는 음식이다.

봄의 개조개는 영양성분이 풍부하고 강장음식으로도 유명해 고금(古今)으로 즐겨 먹었던 고급 조개였다. 남해안에는 제사상에도 올리고 신혼부부의 해로를 위해 이바지 음식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이를 갖은양념으로 정성스레 장만하여 조개껍데기째 화롯불에 자글자글 끓여내니, 조개의 농후하고 구수한 맛도 맛이거니와 단정하고 기품 있다. 그래서 한때 통영에서는 귀한 손님상이나 어른 잔칫상에 올렸고 평소에는 고급 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음식이었다. 그래서 통영 예술인이나 상류층 신사가 즐겨 먹었던 고급 술안주로도 유명했다.

▮사철마다 변신하는 나물(너물)

통영 상류층이 즐겼던 음식이 유곽이라면, 통영 사람들의 삶이 온전히 녹아있는 음식으로는 ‘너물밥’이 있다. 통영 사람들은 제철 ‘땅의 나물’과 ‘바다의 나물’을 다양하게 이용한 나물밥을 즐겨 먹어왔다. 나물 중 태반이 해초 나물이라는 점도 특이한 데다 그 이름마저도 ‘너물밥’이라 한다. ‘너물’을 비벼서 먹는 비빔밥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 ‘너물밥’의 ‘너물’은 큰 대접에 여러 가지 나물을 가지런히 얹고 볶은 조개 육수를 자작하게 함께 섞어 내는데 감칠맛 나는 조개 국물이 들어가 구미가 바짝 당길 정도이다. 이를 밥과 함께 비벼서 먹는다. 서부·경남 지역 제삿밥과 비슷한 모양인데, 통영에서는 잔칫날이나 제사, 명절 때에도 빠지지 않지만 평소에도 즐겨 먹는 음식이다.

나물 종류는 특별히 정해진 것은 없고 있는 대로 제철 나물을 쓴다. 이 때문에 철마다 재료가 다르고 집집마다 나물이 다르다. 겨울철 해조류가 많이 나는 시기에는 청각 톳 미역 서실 파래 구파래 등 해조류 나물 등 10여 가지 나물을 넣어 먹기도 한다. 또한 나물에 넣는 조개가 맛있는 철이기도 하기에,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즈음 가장 맛있는 너물밥을 먹을 수가 있단다.

통영 사람들은 이 ‘너물’을 따로 먹기도 하고 밥과 함께 비벼 먹기도 한다. 따로 먹을 때에는 각각의 나물 맛을 일별하는 묘미가 있고 비벼 먹으면 다양한 맛깔을 한꺼번에 보는 풍미를 즐길 수가 있다. 각각의 나물 맛을 즐기다가 나중에 비벼서 먹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반주(飯酒) 음식으로도 좋다. 나물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하다가, 종국에는 밥을 비벼서 끼니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볼락김치, 발효의 정점

발효의 궁극을 맛보게 해주는 볼락김치.


일전에 통영의 토속 음식을 잘 만들어 내는 식당을 들른 적이 있다. 마른 물메기찜을 시켰는데, 반갑게도 ‘너물밥’이 함께 따라 나왔다. 갖가지 제철 식재료로 만든 반찬 중 ‘볼락 김치’도 있었다. 통영 밥상으로는 군침이 가득 도는 고갱이 음식들만 올라왔다. 나물 대접에 땅의 나물과 바다의 나물. 온갖 나물이 빼곡하다. 콩나물 시금치 숙주 취나물 등과 조물조물 무쳐낸 생미역 나물, 볶은 조개와 두부를 함께 무친 톳나물 등등을 소복하니 앉혔다.

나물 사이로 뽀얀 국물이 자작하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바지락을 참기름 두르고 볶아낸 조개 육수다. 이 조개 육수는 나물 맛을 풍성하게 하고 감칠맛을 최대로 끌어올릴 뿐 아니라 비벼 먹을 때 밥과 나물이 서로 조화롭고 촉촉한 맛을 내도록 해준다.

막걸리 한 잔에 ‘너물’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한다. 각각의 맛과 개성이 확연하다. 다사로운 산들바람이 불고 상쾌한 봄 바다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맛이 들 대로 든 볼락 김치 안 볼락을 한 마리 통째 입에 넣는다. 볼락 안의 억세고 성긴 뼈와 가시가 부드럽게 삭아 녹진녹진하다. 궁극의 발효, 발효의 정점에 서 있는 맛이다. 짭조름하면서도 구수하고 짙으면서도 그윽하다. 그 맛이 끝이 없으면서도 한결같다.

▮통영 사람들의 음식 내공

통영의 제철 식재료와 계절마다 함께 선보이는 통영 너물밥. 이 때문에 통영 너물밥은 통영의 사계절을 오롯이 담은 음식이다. 사시사철 다른 맛을 보여주는, 맛의 변화무쌍함 또한 재미가 있다. 얼핏 보기에는 나물 몇 가지 담아낸 것처럼 보이지만, 나물 하나하나 직접 손질하고 한 가지씩 정갈하게 담아내기에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통영 음식은 어느 것 하나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음식이 없고 정성이 덜한 음식도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음식 솜씨가 야무져야만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는 음식이 통영의 음식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통영 사람들의 통영 음식 사랑은 유별나다. 통영의 자연환경과 통영 사람들의 정체성을 담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유곽’과 ‘너물밥’은 통영의 소울푸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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