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일상적 사랑주의자

안지숙 소설가 입력 2023. 3. 2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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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숙 소설가

나는 ‘일상적 사랑주의자’다. 사랑에 박식하지도 않고 경험도 일천한 내가 감히 사랑주의자를 자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몇 년간 내가 루틴으로 해온 모종의 행동이 놀랍게도 일상적 사랑주의자를 실천하는 방식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종의 행동이라야 별건 아니다. 하루 두어 시간 길거리를 방황하거나, 카페 창가에 앉아 드라마의 OST를 들으며 멍때리는 일 따위이다.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향교의 옆문을 슬며시 밀고 들어가거나, 망망한 기분에 젖어 읍성의 마당을 걷는 일이고, 장관청 옆 회화나무 아래에 서서 이 고장의 역사를 품은 노거수의 시간을 더듬는 일이다.

아니, 웬 백수의 일상을 들고 와서 사랑주의자니 뭐니, 헛소리로 지면을 더럽히느냐, 열받을 것 없다. 세상 한가해 보이는 저 행보가 어째서 일상적 사랑주의자의 실천 방식인지 필자의 입장에 가까이 다가와서 살펴보고 귀 기울이면 급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선 짚어야 할 것이 필자인 내가 전업 소설가라는 점이다. 서너 시간 소설을 끄적이고 판판이 노는 것 같아도, 나는 머릿속에 눌어붙은 소설을 생각하며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산다. 모든 창문과 문을 코르크로 막고 세상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방안에 틀어박혀 창작에만 몰두한 마르셀 프루스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는 이유는 내 삶을 소설의 자장 안에 두고서 소설을 일상적으로 살고 싶어서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남들에 앞서 나 스스로 묻기도 한다. 생각해 보라. 세상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써도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는, 가치 있고 훌륭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책들이 날마다 쏟아져 나온다. 기를 쓰고 소설은 써서 뭐 하나. 탄식하며 좌절하지 않고, 나만이 쓸 수 있는 원고를 붙잡고 끝까지 가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소설의 자장 안에서 소설을 일상적으로 살면서 소설 쓰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인지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나의 산책에 초대하고 싶다. 소설을 일상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유폐된 삶을 산다면서 웬 산책? 놀란 척한다면 너무 잔인한 거다. 아무리 소설에 목숨을 걸었어도 소설가와 소설, 둘 다 숨구멍은 틔워야 하지 않나, 상식적으로. 종일 틀어박혀 있다 산책을 나서면 소설의 자장을 벗어난 충격으로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하는 ‘현타’가 오지만, 잠깐이다. 굳은 관절을 풀고 털레털레 걷고 있노라면 느긋한 설렘이 발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올라온다. 요즘 또 철이 철인지라 날씨가 좀 좋은가. 대기를 채운 햇살 속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노랑 분홍 주홍 보라의 봄꽃과 함께 눈앞에 열리는 풍경은 매일 새롭고 매일 낯설다. 현타의 여파와 타고난 길치의 무능으로 나는 매번 풍경 속에서 길을 잃는다. 어차피 갈 데를 정하고 가는 길이 아니니 길을 가는 것과 길을 잃는 것이 차이가 없다.

스스로 목적지를 잃고 시간을 허비하며 걸어본 사람은 안다. 누구에게나 처음인 이번 생이 열 길 물속같이 깜깜하듯 세상에 자명한 것은 없다는 걸. 잘 아는 풍경도 없다. 잘 아는 나무도 없고, 잘 아는 건물도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몰라야 한다. 나는 골목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다가 폐가의 뒤뜰로 구부러져 들어간 샛길이 허리를 펴는 것을 생전 처음인 양 본다. 모퉁이집의 쪽문이 나니아 이야기 속 장롱처럼 상상의 세계를 품고 있는 걸 눈치채지만, 캐묻는 건 예의상 삼간다. 주인의 취향을 담아 유치하고 귀엽고 소담스러운 카페를 찾아들면 매번 바뀌는 카페라테의 무늬에 마음이 녹는다.


그제보다 어제가, 어제보다 오늘이 새로워지는 순간들이 쌓이면서 세계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조금 더 다정해진다.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한다’고 했다. 그의 말을 살짝 비틀면, 신화에 숨겨진 기의를 찾듯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스며들어 영혼과 마음을 만지는 것, 그 또한 대상을 불멸화하는 것이다. 존재의 불멸을 꿈꾸는 것, 그 이상의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의 자장 안과 밖에서 내가 일상적 사랑주의자를 자처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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