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진보의 경제노선, ‘4번째 국면’ 준비해야

기자 2023. 3. 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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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시야를 확대해보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은 한국 진보의 ‘3번째 경제노선’과 궤를 같이했다. 경제노선을 중심으로 볼 때,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한국 진보 세력은 세 번의 변화를 겪었다. 첫째, 민족경제론이다. 1960~1970년대 지배적인 흐름이었다. 민족경제론은 한국만의 이론이 아니었다. 용어는 조금씩 달랐지만,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같았다. 남미, 동남아시아, 중동에서도 다수 이론이었다. 핵심은 선진국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것이다. 왜? ‘경제적 종속’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4·19 이후 가장 큰 학생시위는 1964년 6·3사태였다. 한일협정 반대시위였다. 당시 재야와 시위대의 반대 역시 ‘경제적 종속’에 대한 우려였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1970~1980년대 내내 ‘외채망국론’을 논거로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선택이 옳았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수입대체 산업화 노선이 아닌 수출중심 산업화 노선을 채택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은 수출 노선의 연장이었다. 중간재 수입으로 무역은 적자였지만, 성장률과 고용률이 급증했다. 1986~1988년 3저 호황을 분기점으로, 무역수지도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꾸준히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했다. 박정희 정부의 선택은 제3세계 국가 중 ‘이단적 선택’이었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도 비슷한 선택을 했다. 하버드대학의 에즈라 보걸 교수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렀다. 이후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한국 모델을 모방했다.

둘째, 1980년대 학생운동 세력은 ‘사회주의’를 수용한다. ‘1980년 광주’가 계기였다. 수많은 광주시민을 죽이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충격이었다. 한국은 작전지휘권이 미국에 있는 나라다. 당시 민주화 세력은 미국의 도움 없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은 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사회과학을 공부하게 되고, 미국과 대면하게 되고, 자본주의에 비판적으로 돌아선 계기가 됐다.

사회주의 경제학은 상품과 시장을 폐지의 대상으로 봤다. 이윤추구, 자본 및 자본가를 나쁜 존재로 봤다.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했다. 사회주의 경제학도 함께 몰락했다.

그 시대에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던 20대에게는 영향을 미치게 됐다. 시장, 자본, 자본가, 대기업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유산으로 남겼다. ‘관성의 법칙’에 힘입어 현재까지도 진보 내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셋째, 유럽식 복지국가 노선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 최근까지 한국 진보의 지배적인 흐름이다. 정책 차원에서 보면, 노동권 강화, 복지 확대, 적극적 국가개입이 핵심이다. 2010년 지방선거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무상급식이 핵심 쟁점이 됐다. 한국 선거사에서 ‘복지’가 핵심 쟁점이 된 것은 처음이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 반값 등록금, 무상보육을 추진했다. 문재인 정부도 소득주도성장론, 최저임금 대폭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을 추진했다.

지난 60년간, 세 개의 경제노선을 평가해보자. 민족경제론과 사회주의 경제학은 결과적으로 오판(誤判)이었음이 드러났다. 반면, 유럽식 복지국가 노선은 지난 20년간 순기능이 더 컸다. 그러나, 2023년 현재도 유효한지는 점검이 필요하다.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지난 20년간 복지 확대가 꽤 큰 수준에서 이뤄졌다. 한국의 사회복지비 증가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가파르다.

둘째, ‘유럽 모델’의 지속 가능성 자체가 회의적이다. 유럽에서 경제성장률이 1%를 넘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극우·극좌 정당의 부상에서 보이듯, 사회통합 수준도 현저히 약화됐다. 셋째,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과정에서 확인되었듯, ‘한국형 복지국가’의 저력이 존재한다. 팬데믹 상황이 터지자, 유럽 복지국가의 허약함이 노출됐다. 예컨대, 영국의 국영의료시스템(NHS)보다 한국의 K방역이 공공성과 효율성 모두에서 우수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한국 사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중국 견제시대, 신(新)보호주의,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초고령화 속도, 인구 피라미드의 급진적 역전. 모두 유럽과 구분되는, 2023년, 한국적 상황들이다. 이제 우리는, 지난 60년간의 시행착오를 딛고, ‘진보의 경제노선 4.0’을 준비해야 한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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