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대통령은 ‘노동시간’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2023. 3. 29.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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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8시간 노동 버스 안내양
서비스업 확산하며 사라져
대통령, 노동시간 고민보다 ‘좋은 일자리’ 토대 마련 힘써야
28일 서울 중구 정동길 일대에서 민주노총 노동시간 개악 저지를 위한 버스킹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23.3.28/뉴스1

정부가 제안한 노동시간 유연화를 두고 야당과 노동계가 ‘주 69시간제’라고 한 것은 악의적인 낙인에 가깝다. ‘기절 노동’이라는 비난도 터무니없는 억지다. 그럼에도 결국 노동 현장은 정부 제안에 등을 돌렸다. 대통령은 “60시간이 상한”이라며 말을 바꾸더니 엊그제 “정책 입안 과정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라”고 말했다. 국민 눈에는 혼란으로 비친다. 야당은 기회다 싶었는지 ‘주 4.5일 근무’ 법제화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이 사태를 지켜보는 동안 근본적인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나라 근로시간은 대통령이 유연화하자고 하면 고무줄이 되고, 야당과 노동계가 줄이자고 하면 줄어드는가. 한때 세계 최장이란 악명을 떨치던 이 나라 근로시간은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최근만 해도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2018년 39.4시간에서 지난해 38시간으로 줄었다. 노동시간은 주는데 국민소득은 늘어 3만5000달러에 달한다. 이게 정치인들이 근로시간 줄이라는 법 만든 덕분인가.

우리나라 노동 관계법은 1953년 제정됐다.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이 그때 처음 정해졌다. 그러나 현장에서 외면당했다. 지키지 않으려 했다기보다 지킬 형편이 못 됐다. 기술 없고 생산성 낮은 나라 국민은 몸으로 벌어 먹는 수밖에 없다. 반세기 전,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 1950~60년대 버스 승하차 보조원(안내양)의 평균 근로시간은 18시간이었다. 하루 네 시간 자고 종일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일하는 가혹한 근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걸 고치고 싶어 했다. 1970년대 어느 회견장에서 “내 집, 내 딸, 내 동생”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안내양 처우 개선을 지시했다. 장시간 근로를 줄이자며 격일제 도입도 추진했다. 하지만 모두 무산됐다. 수혜 대상인 안내양들까지 “근무시간 줄이면 월급도 준다”며 반대했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국 겨울철 버스 틈새로 들어오는 칼바람이라도 피하라며 방한복 1만 벌을 지원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버스 안내양을 장시간 노동에서 구한 것은 대통령 지시가 아니었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며 버스의 운송 부담에 숨통이 트였다. 국민 주머니에 여윳돈이 생기며 커진 서비스업 분야가 새 일자리를 제공했다. 마침내 1989년, 자동차 운수사업법의 안내원 승무 조항이 삭제되며 후진국형 일자리인 안내양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대신, 일은 덜 고되고 보수는 더 두둑한 일자리가 등장했다. 이 나라 근무 시간 감축은 각 분야에서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다.

대통령은 이런 좋은 변화가 더 많은 곳에서 일어나게 하는 걸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대통령은 개별 사업장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대통령은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주당 근무 상한은 69시간이 아니라 60시간”이라고 해봐야 풍자 개그 소재밖에 안 된다.

북한의 천리마 운동은 실패했다. 잘사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며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래 일하게 독려했지만, 생산성은 오히려 추락했고 나라는 가난해졌다. 김일성이 모든 분야에서 만기친람하며 지시하고 확인한 데 따른 부작용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슘페터는 부(富)가 혁신을 통해 창출되지만 그 혁신은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하거나 더 열심히 오래 일하는 것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 했다. 나라를 업그레이드하는 혁신은 노동량과 노동시간 투입이 아니라, 신기술·신제품·새로운 조직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은 그 혁신의 토대를 조성하기 위해 고민하는 자리다. 노동시간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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