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어떤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문제이자 답”

김용출 2023. 3. 2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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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소설가 모하메드 사르 방한
흑인 첫 르노도상 받고 문단서 사라진
‘얌보 우올로구엠 사건’에서 영감 얻어
미스터리 형식 취했지만 다채로운 여정
식민 지배 속 흑인 지식인의 삶 등 다뤄
“문학의 독창성 더 이상 있을 수 없지만
어떻게 재해석하느냐는 고유성은 있어”

야수적이고 원초적인 생명력, 차갑고 가혹하고 잔인한 아프리카의 모습, 강렬한 문체…. 아프리카를 주로 신비적으로 그리던 기존 네그리튀드 문학과 확연히 달랐다. 1968년 프랑스 비평계는 가상의 중세 아프리카 왕조를 배경으로 다양한 사건을 강렬하게 그린 소설 ‘폭력의 의무’에 환호했다. 말리에서 태어난 뒤 프랑스로 건너와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작가가 된 스물여덟의 얌보 우올로구엠(Yambo Ouologuem)은 흑인 최초의 프랑스 르노도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수상 직후 표절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인종 차별까지 얽히면서 처음 환호했던 프랑스 비평계는 방향을 바꿔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출판사 역시 책 출간을 중단하고 출간된 책들을 폐기했다. 아프리카인들마저 비난에 가세했다. 수많은 공격과 문단의 냉대에 상처를 입은 젊은 작가는 말리로 돌아간 뒤, 다신 유럽 땅을 밟지 않았다. 사망할 때까지 전혀 글을 쓰지 않으며 50년간 긴 침묵을 지켰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으로 2021년 공쿠르상을 수상한 모하메드 사르가 최근 방한, 한국 독자들을 만났다. 사르는 “모든 칸에 들어갔다가 나와 보면 마지막엔 작가라는 칸만이 남는다”고 말했다.
베일 속 작가 우올로구엠 사건은 세네갈의 젊은 소설가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Mohamed Mbougar Sarr)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우올로구엠의 모든 것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의 책과, 그 책을 쓴 작가의 운명과, 그 작가의 모든 관계까지도. 영감을 받은 듯, 그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우올로구엠 사건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이 첫 번째 시발점이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그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서 쓰기 시작한 것이죠. 작품을 읽고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점점 매혹돼 갔어요.”

사건을 추적하고 작품을 읽으면서 그는 소설을 통해서 문학과 작품, 역사, 사랑 등을 생각해 보고 싶었다. 문학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식민 및 포스트식민 시대를 살아가는 아프리카 작가들의 지위와 역할은 어떤 것인지. 역사적이고 비극적인 사건과 상황은 어떠했는지….

다만, 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하면 일관성 있게 이끌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더구나 모든 이야기와 주제를 혼란스럽지 않게 한데 뭉쳐지도록 하면서도 구체적 인물을 통해 에너지 넘치게 드러내야 했다.
모하메드 사르의 2021년 공쿠르상 수상작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엘리·사진)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2021년 8월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됐고, 한국어판은 지난해 11월 번역 출간됐다. 소설은 신비로운 작가 엘리만을 찾아가는 또 다른 젊은 작가 디에간 파이의 5주간 여정을 담고 있다.

“T.C.엘리만은 고전이 아니라 컬트였다. 문화적 신화는 게임판과 같다. 그 판에서 엘리만은 세 가지 으뜸 패를 가졌다. 우선 알 수 없는 이니셜로 된 이름을 골랐다. 이어 단 한 권의 책을 썼다. 마지막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렇다. 우리는 그 판에 끼어들어 엘리만의 시체를 손에 넣어야 했다.”

엘리만은 작품을 발표한 직후 ‘흑인 랭보’라는 격찬을 받으며 유력 문학상을 받지만 표절 의혹이 제기된 뒤 몰락하고 사라진다. 디에간은 우연히 같은 세네갈 출신 작가 마렘 시가 D.를 통해서 엘리만과 그의 책을 접하게 된다. 그는 다시 시가 D.를 찾아서 엘리만 이야기를 들은 뒤, 세네갈 다카르로 가서 엘리만의 말년 흔적을 추적한다.

소설은 엘리만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좇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지만, 그 여정에서 보여주는 다채로운 이야기는 물론, 여정 끝에 닿는 지점 역시 흥미롭다. 식민 지배 속 흑인 지식인의 삶 문제와, 문학과 표절의 문제, 즉 문학의 독창성은 무엇인가라는 고민과, 알 수 없는 운명과 사랑….

사르는 이 작품으로 그해 11월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이는 1921년 ‘바투알라’로 공쿠르상을 수상한 마르티니크 출신의 르네 마랑 이후 100년 만의 흑인작가의 수상이었고,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출신 작가의 첫 수상이었다. 수상 당시 사르의 나이는 서른한 살.
사르는 도대체 이 문제적 작품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겨우 삼십대에 불과한 이 젊은 작가의 여로는 어디로 가게 될까. 작가 사르를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기자간담회로 만났다.

―엘리만은 격찬 속에 문학상까지 받지만 표절 논란으로 추락합니다. 표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문학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문학의 독창성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존재하면서 인간 조건에 대한 거의 모든 주제를 다뤘기 때문에 새로운 실존적 주제라는 건 없기 때문이죠. 다만 문학의 고유성이라는 것은 있을 것 같군요. 작가가 오래된 주제에 대한 생각을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자기의 문체로, 자기의 감수성으로 어떻게 재해석을 하느냐, 이런 것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작품 곳곳에서 작고한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 ‘야만스러운 탐정들’(1998)의 흔적이 보이는데요.

“10여년 전, 로베르토 볼라뇨를 알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는 어떤 인물에 대한 생각이나 여러 질문, 탐색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선 반드시 열쇠가 필요했어요. 열쇠가 있어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으면서 책이 쓰이는데, 그 열쇠 역할을 했던 게 바로 볼라뇨의 작품이었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뿐만이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문학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를 깨닫게 됐습니다.”

1990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는 2014년 노예무역에 관한 단편 소설 ‘La cale’을 쓰고 이듬해 자하드 민병대가 장악한 가상의 마을 사헬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장편 ‘둘러싸인 땅’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칠리아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합창대의 침묵’, 세네갈 동성애자들의 삶을 담은 ‘순수한 인간들’, 장편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을 차례로 펴냈다.
―이 시대 문학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학이 어떤 의미일지 말씀드리긴 힘듭니다. 다만 저에게 문학은 어떤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문학을 통해서 지금의 현상을 이해하고, 문학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이해가 됩니다. 저는 문학의 언어와 시간이라는 창을 통해서 이해하는 걸 좋아합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내내 한국어로 감사하다는 말을 한 뒤에야 답변을 풀어놓았다. 질문을 비웃거나 희화화하지도 않았다. 키 190㎝의 그는 한 시간 반 가까이 진행된 기자회견 내내 시종일관 진지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한국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나흘간의 첫 방한, 모하메드 사르는 한국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젊은이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대학, 도시 속의 영적인 공간인 절, 고향의 강을 떠올리게 한 한강, 묘한 신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서울의 야경…. 그날 그가 길게 들이마신 서울 밤공기는, 멀리 파리와 다카르의 공기로 합쳐졌다가, 밤마다 책상 앞에서 상상력을 부풀리는 작가의 허파 속으로 들어갔다가, 문학과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가, 급기야 수많은 이야기의 세계로….

“모든 사람의 인생이 그럴 테지만, 내 인생은 일련의 방정식이다. 우선 몇 차 방정식인지 밝혀지고 각 항이 정해지고 미지수가 설정되고 복잡성이 주어지면, 그런 뒤에 무엇이 남을까? 문학이다. 문학이 남았고, 영원히 문학만이 남을 것이다. 문학이 답이고 문제이고 신앙이고 치욕이고 자부심이고 삶이다.”(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465쪽)

글·사진=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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