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이름이 아니어도…다양한 관계 인정하고 끌어안어야”[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손제민 기자 2023. 3. 2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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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정책팀장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정책팀장은 가족구성권을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살아갈 권리”라고 설명하며 “정상가족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꼭 가족이란 이름이 아니어도 서로 돌보는 다양한 관계들을 가족처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비혼 여성으로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실천하고 연구해왔다. “다양한 소수자 운동에 참여하는 인권활동가, 퀴어활동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019년 만들어진 가족구성권연구소 정책팀장이자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반상근 활동가이다.
가족을 혼인·혈연으로 이뤄진 관계로 보는
민법 779조 폐지해야 다양한 관계 보호할 수
그래야 의료·주거안정성 등 차별 줄어들어

한국에서 개인이 가족에 의존하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가족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사회·경제 제도가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가족에 돌봄·양육·부양·간병 등 사회 재생산과 관련된 대부분의 책임을 부과해놓고 많지 않은 혜택도 가족을 통해 배분한다. 이것은 태곳적부터 그랬다기보다 국가 주도 경제 발전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가족 보호의 밖에 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인구 위기가 운위되는 걸 보면, 그 가족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문제의 핵심을, 소임을 다한 제도적 가족주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얘기를 오래전부터 해온 사람들이 있다. 가족구성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가족 해체론자가 아니다. 다른 여러 이유로 가족이 이미 해체되기 시작한 현실을 직시하고 다양한 가족을 적극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지난 20년간 가족 형태는 크게 변했다. 2000년 전체 가구 중 15.5%였던 1인 가구는 2021년 33.4%로 늘었다. 1인·한부모·부부 2인 등 다양한 형태의 가구(53%)가 부부·미혼자녀(대가족 포함)로 이뤄진 가구(47%)를 앞질렀다. 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부부와 미혼자녀로 이뤄진 가족을 중심으로 세상과 정책을 보는 관점을 고집한다. 그 결과 가족을 경유해 제공되는 사회복지 시스템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이나 아동, 미혼모, 최근 건강보험공단 상대 재판에서 승소한 소성욱·김용민씨 같은 동성 부부가 대표적 사례다. 15년 이상 가족구성권 운동을 해온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정책팀장은 그러한 구멍이 소수자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라고 했다. 정상가족을 위한 혜택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엔 이성 동거 가구, 중년 1인 가구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나 팀장을 지난 23일 서울 은평구 사회경제적허브센터에서 만났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결혼에 수반된 권리
가족 아닌 개인 단위로 배분하는 게 마땅
그게 ‘다양한 곁’이 가능한 사회로 가는 길

- 개인적으로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40대를 지나는 제게도 계속 질문거리입니다. 유년 시절 원(原)가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되는 상황에서, 이것이 주어진 관계라는 점에 답답함을 느꼈어요. 거기서 빨리 벗어나 내가 선택한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원가족이 제게 베푼 돌봄과 부양의 가치를 인정해요. 다만 지금은 그걸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돌려줄지 고민해요.”

- 스스로 가족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하우스메이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데요. 제 애인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조금 이상한 형태의 가족이라 할 수 있죠. 집에는 고양이를 함께 돌보고, 밥도 같이 먹고, 집안일도 같이하는 하우스메이트가 있는데, 가장 친밀한 사람은 멀리 있는 상황이에요. 원가족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그 모두를 가족으로 부를 수 있다고 봅니다.”

- 가족구성권은 무엇인가요.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살아갈 권리예요. 2005년 호주제 폐지 후 대체입법을 논의하며 나온 개념인데요. 저는 당시 장애여성 공감이란 단체에 있으며 시설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가족이 거부하는 장애인들이 결국 시설에 수용되는데, 이들이 시민으로 출현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결국 정상신체를 중심으로 한 정상가족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고 봤어요. 어쨌든 대체입법 논의 중에 진보진영이 주장한 출생·국적·혼인 등 목적별 신분등록제는 채택되지 못했고, 지금처럼 통합된 가족관계등록 제도가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가족을 경유해야만 내가 누구인지, 살아 있는지, 한국인인지 증명할 수 있죠. 가족관계등록부를 보면 본인·배우자·자녀가 죽 뜨는데, 이게 바로 가족이고 당신 신분을 증명하는 거라고 계속 상기시켜 주거든요. 호주제 폐지 후 주류 여성운동은 다른 의제로 넘어갔지만, 정상가족 틀에 맞지 않아 불화하는 존재들은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 했어요.”

그래서 2006년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제안으로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이 꾸려졌다. 프랑스 시민연대계약법(PACs) 등 해외 사례를 연구하고 국내 가족 관련 법제·인식을 추적했다. 연구모임은 2019년 가족구성권연구소로 확대됐다. 한국 가족의 독특성은 민법 779조에 집약돼 있다. 호주제 폐지 후 신설된 이 조항은 가족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은 채 가족 범위를 ‘배우자·직계혈족·형제자매,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혈족의 배우자·배우자의 직계혈족·배우자의 형제자매’로 나열했다.

“가족을 혼인과 혈연으로 이뤄진 관계로만 본다는 규정이 생긴 거죠. 민법에 이런 규정을 둔 나라가 많지 않아요. 다른 법률에서 이 민법 조항을 준용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 범위 밖 관계들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졌어요. 저희 연구소가 2019년 국내 1400개 법률 중 가족을 언급하는 240여개 법률을 살펴봤어요. 1차적으로 돌봄과 부양 책임이 가족에게 있는데 그게 어려운 경우엔 국가가 보조하겠다는 게 굉장히 많았어요. 가족을 유지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고, 그걸 따라야만 올바르고 정상적인 시민으로 간주하겠다는 거죠.”

동성 커플 소성욱·김용민씨가 지난 2월21일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달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뒤 기뻐하고 있다. 김희진 기자

- 이번 동성 부부 판결은 그 공고함에 균열을 낸 사건이군요.

“소수자 평등권 차원에서 큰 진전입니다. 동성혼 법제화 운동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그쳐선 안 됩니다. 왜 건강보험을 부양자-피부양자 관계를 따져서 줘야 하는지 물어야 해요. 소득 없는 사람도 과도한 지역 가입자 비용을 냅니다. 직장 가입자 중심으로 건보 제도가 설계돼 있어 생긴 불평등이죠. 동성 부부 둘 다 지역 가입자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둘 다 정규직이라서 부양자·피부양자 관계를 인정 받을 실익이 없다면 이 차별은 중요하지 않을까요. 정규직 가장·배우자·자녀라는 가족 모델과 그걸 토대로 한 기업 복지로 인해 이런 차별이 생겨난 겁니다. 부양자·피부양자 관계를 증명하지 않아도 건보료를 자기 소득에 맞게 내고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죠.”

가족을 통한 사회 운영은 점점 더 도전받고 있다. 1인 가구 증가가 잘 보여준다.

“예전에 1인 가구는 결혼이 늦어지는 청년층 얘기였는데 지금은 이혼하든 사별하든 애초 결혼하지 않든 비혼 비율이 40~64세에서 높아졌죠. 1인 가구 중 이 연령대가 40% 가까이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청년과 노년 1인 가구입니다. 이들은 소득 면에서 중년보다 열악해요. 중년 세대는 정규직 경력이 있거나, 프리랜서라도 자신을 건사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요. 그에 비해 처음부터 나쁜 일자리에서 시작해 계속 혼자 살아가는 청년 세대는 중년 비혼들만큼 만족감을 누릴 수 없을 거예요. 또 노인 빈곤율·자살률이 높은 이 나라에서 노년 1인 가구도 존엄하게 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 왜 혼인에서 이탈하는 걸까요.

“내가 원가족의 돌봄을 받아 성장한 것은 알겠는데 부모가 나이 들었을 때 그걸 내가 모두 갚아야 한다는 압박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부모들도 노후에 자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길 원치 않을 거예요. 부모들도 공적 지원 제도 안에서 자녀들과 역할을 배분한다면 모두들 지금보다 여유가 생길 거고요. 많은 사람이 결혼을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내 가족이 전부 심사받는 느낌으로 해야 하는 것도 원치 않아요.”

- 혈연·혼인에 의하지 않은 비친족 가구 증가는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합니다.

“통계 내는 방식 때문입니다. 저도 인구주택총조사에 응하면 1인 가구로 나오거든요.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고, 돌봄과 생계 부담을 나누고 있음에도 그래요. 1인 가구, 동거 가구, 시민 결합에 대한 지원 정책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통계를 내지 않는 겁니다. 현실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가구를 알아야 사회가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파악할 수 있어요.”

출생·죽음 가족 품서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아
저출생·고령화 해법 달라져야 하는데 안 돼

- 비친족 가구는 어떤 차별을 받나요.

“연구소에서 조사해보니 가장 많이 나온 것은 의료 관련이에요.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살고 있고 서로 중요한 사람인데, 입원·수술 동의를 할 수 없고 중환자실에 못 들어가는 거죠. 내가 수년간 간병을 했음에도 연락도 안 되던 가족이 갑자기 나타나면 나는 배제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도 애도의 주체가 될 수 없어요. 주거 안정성도 문제예요. 가족 안에 있다고 주거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조금 있는 주거복지 정책에 접근하려 할 때 가족이 아니면 차단되는 게 많아요. 임대아파트에 이성 동거나 동성 커플은 함께 신청할 수 없고, 주택자금 대출을 받을 때도 불이익이 있어요.”

- 어떤 입법 조치가 필요할까요.

“민법 779조를 시급히 삭제해야 합니다. 그 가족 범위 밖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동성혼 차별을 해소하되, 결혼하든 안 하든 결혼에 수반된 ‘1000가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 제정도 중요하고요. 내가 죽게 됐을 때 연명의료 결정권, 재산 처분권 등을 원가족이 아니라 ‘내가 지정한 1인’이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도 절실합니다.”

- ‘내가 지정한 1인’은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요.

“개별 법에 명시하면 됩니다. 국회의원들이 이미 자기들 관련된 건 그렇게 하고 있어요. 공직선거법에 예비후보자의 배우자와 직계존비속만 명함을 돌릴 수 있었는데, 여기에 ‘배우자가 없는 경우 예비후보자가 지정한 1인’이 할 수 있도록 했어요. 정치인들은 자기 이익이 걸린 문제엔 물샐 틈이 없죠. 이 제도는 국가 비용이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시민 복리를 증진하고 사회적 위험을 줄일 수 있는데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든 아동 기본권 보장
공감대 강한 사회일수록 출생률 올라가
젊은층 혼인서만 해법 찾는 정치권이 문제

그는 가족구성권 운동이 가족 범위를 늘려나가는 접근이라기보다 권리 배분을 가족 아닌 개인 단위로 하는 데 방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가족인지 아닌지 계속 판단해야 한다면 배제되는 사람이 계속 나올 거예요. 그래서 이 운동을 동성 부부 문제로 국한하지 않게 되는데요. 이성도 동성도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영받는 시민은 비싼 결혼식 비용을 대고 집을 살 수 있는 소비 능력이 있는 시민들이지 그게 동성인지 이성인지 가리지 않아요. 동성 부부도 돈이 많다면 결혼이 환영받을지도 몰라요. 물론 동성 부부에 대한 명백한 차별을 해소해야 하지만요. 돌봄·부양·간병·양육은 그걸 가족으로 이름 붙이든 안 붙이든 사회적 재생산을 위해 필요해요. 최대한 많은 관계를 가족으로 호명하기보다 실제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다양한 관계들을 사회적으로 인지하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해요. 그게 ‘다양한 곁’이 가능한 사회로 가는 길입니다.”

- 인구 위기 대응에 배치되진 않나요.

“한국인 머릿속에는 출생도 죽음도 가족 안에서 하는 게 정상이었죠. 그런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아요. 저출생·고령화 해법이 완전히 달라져야죠. 하지만 달라진 적이 없어요. 계속 젊은층을 혼인시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고 다른 해법에 관심을 안 기울이는 정치권 문제가 가장 큽니다. 우리가 이미 소개한 해외 사례가 많아요. 진보적인 가족 정책이 시행된 나라에서는 많은 아동이 결혼 밖에서 태어나더라도 차별받지 않고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려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든 아동은 기본권을 누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강한 사회일수록 출생률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한국은 가족 밖 아동을 정말 말도 안 되게 대접해왔어요. 시설에 보내거나 해외입양 보내거나, 그 존재를 아예 없애는 방식을 취했어요.”

- 낙태죄 헌법불합치 후 4년이 지나도록 국회는 후속 입법을 하지 않고 있는데요. 정치권에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요.

“경제 중심의 국가 기조와 인구 정책이 문제입니다. 국가로선 현 질서를 유지하는 게 기득권에 도움이 될 겁니다. 돌봄을 사회화하면 국가 책임이 커지게 되는데, 그걸 최대한 저지하는 역할을 정치권이 하고 있어요. 정치권이 굉장히 시장 논리로 움직여요. 진보정당 일부를 제외하고,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죠. 이러한 경제 논리가 가족 생활과 재생산 영역을 파괴해왔어요. 그게 지금의 가족 문제이고 인구 문제입니다. 낙태죄 논란 때도 봤지만 생명을 정말 위계화하고 도구화하잖아요. 정치가 어쩌면 이렇게 일반 시민의 삶에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요. 모든 법을 만들 때 설득 논리가 경제에 이롭다는 걸로 수렴됩니다. 이번에 한 의원이 발의한 외국인 가사도우미 법안을 보며 깊은 절망감을 느낀 여성들이 많아요. 그동안 우리가 해온 돌봄과 아이 양육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길래 저렇게까지 할까 싶을 거예요. 그런 식으론 저출생 해결 못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며 서로 돌보고, 출산이나 입양으로 얻은 자녀를 키우는 것, 혼자 살더라도 편한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며 사는 것. 이 모든 게 꼭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 이상론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게 현실이다. 그 흐름을 막기 어렵고, 제도 밖 사람이 많아질수록 어느 시점엔 무게의 추가 기울 것 같다. 어쩌면 개개인의 마음속에서는 벌써 기울었을지도.

손제민 논설위원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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