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반도체 보조금 줄게, 영업기밀 내놔”…국내 업계 속앓이

이본영 2023. 3. 2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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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미국 상무부가 ‘칩과 과학법’(반도체법)에 따라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는 기업들이 보조금을 신청할 때 전반적인 투자 자금 조달 방안 등 일반적 경영 정보뿐 아니라, 반도체 ‘수율’(무결함 제품 비율) 등 민감한 핵심 영업 기밀까지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삼성전자 등 투자 기업들의 경영 정보를 자세히 파악해 ‘초과이윤’이 나오면 보조금을 환수하는 근거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상무부는 27일(현지시각)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는 기업들이 보조금을 신청할 때 제출해야 하는 정보에 대한 ‘상세 지침’을 내놨다. 이를 보면, 보조금 신청 기업들은 우선 투자 장소, 규모, 자금 조달 방안 등 투자와 관련된 정보를 알려야 한다.

상무부는 나아가 ‘재무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시설의 상세한 운영 전망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분기별 시설 가동률, 웨이퍼 생산량, 수율, 제품 종류별 예상 가격·매출을 써내도록 했다. 또 생산비 측정을 위해 경영자·기술자 등 분기별 직군별 인건비, 회계·마케팅·물류·법무·연구에 들어가는 비용 등도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질소·산소·수소·유황산 등 생산에 쓰는 물질, 전기·물·천연가스 사용 비용 등 운영비와 관련된 내용도 모두 보고해야 한다.

상무부는 앞서 보조금 지급 대상의 현금흐름과 대차대조표를 살펴보겠다고 했는데, 일반적 재무제표 수준의 정보를 넘어 생산시설 운영 전반에 관한 기업 내부 정보까지 상세히 공개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상무부는 이런 자료가 “보조금의 규모와 형식, 조건의 평가와 설정뿐 아니라 투자의 성공 가능성, 재무구조, 경제적 이익 평가에 쓰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또 전망치는 일관되고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추산해야 한다면서 이 정보를 추적·연동·조정할 수 있도록 엑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제출하라고 했다. 기업 안팎의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손익 전망을 시나리오별로 제시하라는 주문도 했다.

상무부는 지난달 28일 390억달러(약 50조6200억원)에 이르는 반도체 투자 보조금과 관련한 투자 의향서 접수를 시작하며, 1억5천만달러(약 1950억원) 이상 보조금을 받은 기업의 경우 이익이 예상치를 초과하면 보조금의 75% 이내에서 환수한다는 방침을 공개했다. 보조금 환수를 위해 기업이 제출한 이익 전망치와 실제 지출·실적 등을 비교·검증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반도체 기업들이 최고 기밀로 꼽는 수율까지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분명치 않다.

상무부는 이와 함께 노동력 개발에 관해 “적절한 투자, 고용, 훈련, 고용 유지, 신기술 교육, 인력 다양성”을 위한 전략을 제출하라며 97페이지짜리 별도 지침을 내놨다. 이 지침을 보면, “빈곤층의 취업과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비롯해 노동력을 훈련하기 위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하도록 지역 교육·훈련 기관과 약정을 맺어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결국 삼성전자나 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이 보조금을 받으려면 수율 등 영업 기밀을 미국에 자세히 제공하고 생산 인력 교육까지 폭넓게 책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상무부는 지난 21일 공개한 ‘가드레일’(투자제한장치)에선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중국 내 생산 확대 폭을 10년간 5%를 넘어선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결국 보조금을 받으려는 한국 기업들은 예상치 못한 엉뚱한 혹을 주렁주렁 매달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에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을 지으며 보조금을 받으려는 기업은 오는 31일부터, 나머지 반도체 생산시설과 후공정 시설을 지으려는 이들은 6월26일부터 신청서를 낼 수 있다.

미국의 요구에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공식적인 입장은 삼가면서도 “지나치다”는 반응이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반도체 생산을 위한 소재, 장비는 물론 수율 역시 회사 안에서도 일부만 공유하는 민감한 정보”라며 “이를 외부에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이정훈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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