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기념사에 어른거리는 ‘사회진화론’이라는 유령

고명섭 2023. 3. 2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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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의 카이로스][고명섭의 카이로스]

다윈이 생각한 적자는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한 자’라는 의미를 넘어서지 않는다. 적자는 반드시 진보나 상승을 뜻하지 않는다. 퇴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펜서는 자연과 사회가 최상의 목표를 향해 끝없이 진보한다는 가정에 근거해 다윈의 이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렇게 받아들여 짜낸 것이 사회진화론 혹은 사회다윈주의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1809~1882). 다윈의 진화론은 허버트 스펜서에게 영향을 주어 사회진화론을 낳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한 가지 어려움’이라는 글에서 인류의 나르시시즘(자기애)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사람으로 코페르니쿠스와 찰스 다윈을 거명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로 인간의 거처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깨뜨림으로써 인류에게 ‘우주론적 모욕’을 안겼다. 다윈은 진화론으로 인간이 동물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인류에게 ‘생물학적 모욕’을 주었다. 이어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이론이 인간의 의식을 무의식의 바다에 떠 있는 섬으로 축소하는 ‘심리학적 모욕’을 가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 자신을 코페르니쿠스·다윈과 함께 서양지성사의 3대 혁명가로 간주한 것이다.

프로이트 말대로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이 인간을 신이 창조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던 당대의 창조론자들에게 모욕감을 준 것은 분명하다. 다윈의 책에 분노한 사람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댄 풍자화를 그려 반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의 기원> 출간을 인류에게 주는 축복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영국의 사회철학자 허버트 스펜서(1820~1903)가 다윈의 진화론을 환영한 사람들의 대표자라 할 만하다. 다윈의 저서가 나오기 전에도 진화의 법칙을 굳게 믿고 있었던 스펜서는 <종의 기원>이 출간되고 5년이 지난 뒤 펴낸 <생물학 원리>에서 다윈 혁명을 자기 방식으로 더 밀고 나갔다. 다윈이 생물 진화의 원리로 제시한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 바꾸고, 적자생존의 원리를 생물 영역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적용했다.

다윈과 스펜서는 썩 어울리는 쌍은 아니었다.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 다윈은 이렇게 적었다. “허버트 스펜서와 나눈 대화는 흥미로웠으나 내가 스펜서를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그 사람과 친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스펜서의 글이 내 작업에 도움이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펜서의 기본적인 일반화는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아주 귀할지 모르지만, 과학적인 용도로는 그다지 가치가 없다.”

다윈의 고백은 실제로 벌어진 일과는 조금 달랐다. 스펜서는 19세기 영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린 대중철학자였다. 스펜서 저작의 막강한 영향력은 다윈의 저서에도 침투해 흔적을 남겼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간한 뒤 여러차례 수정했는데, 제5판에서 스펜서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연선택’을 다룬 제4장의 제목을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으로 바꾸었다. 이 작은 가필이 적자생존이라는 스펜서의 용어가 다윈 사상의 핵심으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다윈의 스펜서 수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윈의 개념으로 알려진 ‘진화’(evolution)라는 말도 애초 스펜서가 <생물학 원리>에서 처음 썼던 말이다. 다윈은 ‘진화’가 ‘어떤 궁극 목적을 향해 끝없이 진보함’을 암시한다고 보아 <종의 기원>에서 그 용어를 피하고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라는 중립적인 말을 썼다. 하지만 스펜서의 간명한 용어가 널리 퍼지자 결국 그 말을 받아들여 <인간의 유래>(1871)라는 책에서부터 쓰기 시작했다.

스펜서가 고안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은 그 표층적 의미만 보면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자연선택이란 ‘자연이 여러 변이를 지닌 생물 가운데 특정한 개체를 선택한다’는 뜻이고, 적자생존이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생물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자연을 주체로 놓고 보면 자연선택이고, 생물을 주체로 놓고 보면 적자생존이다. 그러니 다윈이 적자생존이란 용어를 수용한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적자생존의 넓은 함의 가운데 어디에 힘을 싣느냐에 따라 이 말의 진로가 아주 달라진다는 데 있었다.

스펜서가 관심을 둔 것은 생물 진화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진화였다. 생물 세계에서 가장 잘 적응한 자가 살아남듯이 인간 사회에서도 가장 잘 적응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이 스펜서가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이야기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스펜서에게 ‘가장 잘 적응한 자’는 ‘가장 우월한 자’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적자생존이라는 스펜서 원리는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한다는 우승열패,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이로 삼는다는 약육강식을 내장한다. 스펜서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그대로 발현되면 인간 사회가 끝없이 진보해 부적응자는 모두 도태하고 우월한 인간만 남는 행복한 미래 사회가 열린다고 생각했다.

허버트 스펜서(1820~1903).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쯤에서 보면 스펜서가 말한 적자생존이 다윈이 생각한 적자생존과는 아주 다른 것임이 분명해진다. 다윈이 생각한 적자는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한 자’라는 의미를 넘어서지 않는다. 적자는 반드시 진보나 상승을 뜻하지 않는다. 빛이 없는 동굴에 갇힌 생물은 그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시각과 같은 불필요한 기관을 없애고 최소한의 기관으로만 생존한다. 적자생존은 퇴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펜서는 자연과 사회가 최상의 목표를 향해 끝없이 진보한다는 가정에 근거해 다윈의 이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렇게 받아들여 짜낸 것이 사회진화론 혹은 사회다윈주의다.

그 사회진화론을 신념으로 품고 스펜서는 사회를 자연상태와 유사한 상태로 놔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상태에서 적자가 살아남아 진화하듯이, 사회도 인위적인 개입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둘 때 가장 빨리 진보한다. 그리하여 스펜서는 국가가 개입해 빈민을 구제하는 사회보장정책에 반대했다. 개인들이 무한정 경쟁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하면 되지 국가가 나서서 울타리를 치는 것은 경쟁을 제약함으로써 진보를 가로막는 부도덕한 일이다. 앞시대 토머스 홉스가 말했던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자연상태’야말로 스펜서가 생각한 바람직한 사회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적자들이 살아남아 최상의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스펜서는 믿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사상은 산업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미국에서는 특히 앤드루 카네기와 존 록펠러 같은 철강·석유재벌이 스펜서 사상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 사람들에겐 억만장자야말로 적자생존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회진화의 승리였다. 스펜서 사상을 추종한 미국 사회학자 윌리엄 섬너는 ‘부적합자가 계속 생존하는 것은 반문명적이며 적자생존이 문명을 이끄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부적합자는 문명 진보를 가로막는 자, 존재 자체로 문제 있는 자가 됐다.

스펜서는 정부 개입이 경쟁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국가를 거부한 반국가주의였다. 그러나 그 사상에 담긴 약육강식 논리는 국가의 침략 정책을 변호하고 부추기는 제국주의 논리로 즉각 전환됐다. 제국주의자들은 스펜서 이론에서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사회 진보의 법칙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강자의 지배가 사회를 진보시킨다는 그 논리는 제국주의 세력의 도덕적 부담을 덜어줬다. 우생학과 인종주의도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서 힘을 얻었다. 더 우월한 자를 낳아 기르고 나머지를 도태시키는 것이 인류 발전에 이롭다는 우생학은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여 번성하는 것이 사회진화의 법칙이라는 인종주의로 이어졌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19세기 말 동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진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옳고 그 법칙을 거부하는 것은 그르다’는 사회진화론의 유사윤리학적 이데올로기는 당대의 지식인을 두루 감염시켰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죄의식 없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데올로기에 담긴 사이비 윤리 덕이었다. 스펜서 이데올로기는 조선의 관료와 학자들까지 집어삼켰다. 사회진화론에 젖은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이완용·이광수가 그 이데올로기를 신념으로 받아들여 나라를 팔고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었다.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침략을 정당화해주는 데 더해 침략받은 약자를 자기부정으로 이끄는 악성 이데올로기다. 상대편이 아니라 힘없는 쪽에 잘못이 있다며 자신을 탓하게 한다.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 이데올로기는 20세기를 넘어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서 위세를 부린다. 그 이데올로기 유령이 지난 삼일절 대통령 기념사에까지 출몰했다, 침략당한 우리가 문제였다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논리가 거족적인 반제국주의 항거를 기념하는 날을 휘저었다. 옛 제국의 향수에 젖은 일본 극우세력의 이데올로기에 투항한 사람이나 할 법한 삼일정신 모독이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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