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명칼럼] 日이 좋아서? 日이 거기 있으니까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3. 3. 2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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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이 거기에 있어서 간다"
'반공' 닉슨이 중국 갈 때 한 말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말한 것
日이 있는 그곳에 미국이 있고
우리의 이익도 있다

리처드 닉슨이 1972년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이 회담에서 말했다. "선거 때(1968년 미 대선) 각하가 당선되길 바랐습니다. 나는 우파를 상대하는 게 좋습니다." 마오는 당시 영국 총리였던 보수당 당수 에드워드 히스, 독일 기독민주당을 거론하며 "우파들이 집권했을 때 난 좀 더 해피하다"고 덧붙였다. 닉슨의 방중을 수행했던 헨리 키신저가 저서 '온 차이나(On China)'에서 소개한 일화다.

평생 반(反)우파 투쟁을 했던 마오의 이 말은 기묘하게 들리지만 진담 같다. 반공주의자 중에서도 매파였던 닉슨이 '대중 데탕트'에 나선 아이러니를 놓고 '중국에 간 닉슨(Nixon goes to China)'이라는 정치학 용어가 생겨났다. 특정 이념지향을 지닌 지도자가 그와 반대 방향 정책을 펼칠 때 여론 설득이 용이한 현상을 가리킨다. 닉슨이 아니라 미국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 중국에 갔다면 매카시즘 역풍이 불었을지 모른다. 마오는 서방에서 우파가 집권할 때 대화 공간이 생겨난다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제징용 해법은 우파 윤석열 정부가 아니라 좌파 문재인 정부 때 나왔어야 했다. 문재인이 도쿄에 가서 아베를 만났더라면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역사적 결단'이라 칭송했을 것이고 보수 야당은 '이번엔 잘했다'고 박수 치지 않았을까. 전례도 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때, 일본 대중문화에 문을 열었을 때 좌파가 잠잠했던 것은 대통령이 같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좌파 정부가 대일 외교에서 쓸 수 있는 유리한 카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탐식하듯 반일을 했고 그 결과 한·미·일 공조는 설사를 했다. 지금 그 설사를 윤석열 정부가 치우고 있다. 민주당은 그런 윤 정부를 '냄새 난다'며 손가락질한다.

닉슨은 왜 중국에 갔나. 중국 방문을 앞두고 닉슨은 주(駐)대만 미국대사에게 설명했다. "중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중국이 거기에 있으니까. 미국의 이익이 그것을 요구하니까." 닉슨은 중국의 잠재력이 영원히 죽(竹)의 장막 안에서 잠자고 있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정비된 정부 시스템 밑에 8억명(당시 중국 인구)이 있는 나라는 당연히 세계의 리더가 된다." 키신저는 자신이 아는 10명의 미국 대통령 중 닉슨이 장기적 국제 흐름에 대한 이해력에서 가장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일본과 관계를 회복하는 데 일본을 좋아하고 말고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외교는 이익으로 시작해서 이익에서 끝나므로. 닉슨 식으로 말하면 '일본이 거기 있으니까. 그곳에 우리의 이익도 있으니까'다. 중국 공산화 이후 미국 아시아 전략의 주춧돌은 일본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미국은 미·일동맹을 앞세워 그들을 견제할 것이다. 한국은 미·일과 중·러의 각축장에서 미·일 편에 섬으로써 유사 이래 가장 번영했다. 그러다 강제징용 문제로 우리는 일본과 척졌고 더 중요하게는 미국과도 멀어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일 때 그가 얼마나 한국과 갈라서고 싶어했는지 증언하는 여러 회고록들이 있다. 심장 떨리는 얘기다. 한·미·일 공조는 여전히 우리의 절대 이익선이며 다시 선명하게 그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징용 판결로 파국의 빌미를 제공한 한국 대통령이 일본에 가야 했다.

닉슨이 저우언라이에게 말했다.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나는 (매파였던) 덜레스 국무장관과 생각이 비슷했지만 세계는 변했고 미·중 관계도 변해야 한다. 당신이 키신저에게 말한 것처럼 키잡이는 파도를 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조류 속에 가라앉는다." 지금 한·미·일 공조에 올라타려는 키잡이에게 "그 파도를 왜 타느냐"며 화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무지가 이 나라를 시대의 바다에서 난파하게 할지도 모른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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