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대중 신뢰 없이 존립 이유 없어...한의사과학자 양성해야"

대전=고재원 기자 2023. 3. 2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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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용 한의학연 원장 "의료기기 활용 갈등, 의료 소비자 만족이 관건"
이진용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한의학연 제공

지난해 12월 국내 한의학 산업현황을 담은 ‘한의약산업실태조사’가 공개됐다. 조사에 따르면 한의원, 한방병원 등 한의약산업체 1197개 중 49.1%가 2022년 업황이 2021년 대비 나쁘다고 평가했다. 2020년 대비 2021년 업황 역시 62.2%가 나쁘다고 응답했다. 매해 최소 절반 이상이 한의약산업 업황이 나빠지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은 한의약산업 성장 필요요인을 묻는 질문에 ‘고객과의 신뢰구축’을 1순위로 꼽았다. 의료 소비자인 대중의 한의학에 대한 신뢰 회복이 업황 개선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진용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을 지난 21일 대전 유성구 한의학연 본원에서 만났다. 올 4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 이 원장은 지난 2년에 대해 “한의학 신뢰 회복을 위해 한의학 과학화와 표준화에 집중한 기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화, 표준화 없이는 의료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고,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한의학이 존립할 이유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경희대 한의학과 학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1년부터 경희대 한의대 교수로 재직한 한의학 전문가다. 경희대 한방병원 기획진료부원장과 병원장 등도 역임했다. 그는 그간 한의학이 대중의 신뢰에서 멀어졌던 이유를 ‘환경’에서 찾았다. 이 원장은 “서구문화를 기준으로 현대적 삶을 수십년 간 살아왔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과거 대비 조금 더 과학적이고 표준화돼 보이는 쪽으로 관심이 흘러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한의학 업계도 타격을 입었다. 한의약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한의약 관련 산업체는 2019년 대비 2.2% 감소하며 653개사로 줄었다. 제조업이나 소매업은 각각 7.3%, 12.5%나 산업체가 줄었다.

한의학연은 1994년 문을 연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한의학 이론 및 기술, 한의의료행위 등에 대한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성과를 확산해 관련 산업 육성과 국민보건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다. 한의학계에서 위기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업계에서 고객과의 신뢰 구축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가운데 한의학연의 역할론에 대한 고민도 제기된다. 

이 원장은 “한의약 산업은 다른 분야에 비해 사업 규모가 작고 영세 사업체가 많아 대규모 비용이 투입되는 기초연구에 힘쓰기 어렵다”며 “이런 부분을 한의학연에서 1차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한의학 과학화와 표준화는 결국 기초연구에 기반한다”고 말했다. 한의학이 위기를 겪고 업계가 불황에 빠질수록 한의학연의 역할이 더욱 커진다는 설명이다. 

지난 2년 간 한의학연 연구팀은 '세계 최초 한의소재 기반 면역관문 차단 종양치료 기술’ 개발, ‘포도나무 줄기 등 천연물 유래성분 활용 항바이러스 치료 소재 개발’ 등의 연구 성과를 내놨다. 뽕나무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감염을 억제하는 성분을 발견했다는 연구, 연잎 유래 성분에서 독감 바이러스 억제 효능을 확인했다는 연구 등도 있다. 

기초연구 외 기술이전 성과도 내고 있다. 이 원장은 “기초연구를 넘어서 응용연구 상용화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기술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해당기술을 이전해서 산업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며 “지난해에도 사업체와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용 조성물 기술의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미중 기술패권 시대에 국가경쟁력을 높이는데 한의학연이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정부는 12대 국가전략기술을 선정했는데, 여기엔 ‘첨단 바이오’가 포함돼 있다. 이 원장은 “한의학연과 첨단 바이오는 관련이 깊다”며 “한의소재 기반 천연물 합성신약 개발 등 새로운 미래 의학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원격의료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침 시술 등도 제시했다.

‘한의사과학자’ 활용과 육성 역시 한의학연의 주력 관심사항이다. 이 원장은 “한의사이면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한의사과학자는 중요하다”며 “한의학의 정수와 첨단 바이오 영역을 융합하면서 한의학 과학화와 표준화를 이끌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의료기기 활용 등을 놓고 한의학계와 양의학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 원장은 “이런 갈등은 사람을 깊게 이해하고, 치료하는 ‘의학’의 기본과 닿아 있는 문제”라며 “단순히 어떤 직역 간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이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한의학이냐, 양의학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의료 소비자의 필요를 정확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따지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원장 임기는 내년 4월까지다. 이 원장은 “남은 임기 동안 한의학연이 하던 일에 집중하면서 인류에 도움이 되는 우수 결과를 창출하고 확산시키겠다”며 “한의학을 선택해야만 하는 신뢰를 줘서 의료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대전=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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