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19세기 산모 사망률 낮춘 의학자, 정신병원에 수용된 사연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2023. 3. 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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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의 인생은 험난할 수도 있다

‘글로벌 인재’와 같이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들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흔히 ‘창의성’이 덕목으로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는지를 돌이켜 보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앞서 '암도 유발하는 '바이러스' 유래는 '독성물질'(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57649)'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소개한 라우스(Peyton Rous)는 바이러스가 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66년이 지난 다음 뒤늦게라도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됐지만 역사 속에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정을 받지 못한 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시대를 앞서간 발견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미 기득권자들에게 특별히 이익이 되는 것도 없는데 그동안 자신이 이야기한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의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 10개를 선정한다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최초의 백신은 1796년 영국의 제너(Edward Jenner)가 발견했다. 제너는 '18세기 말 키 2.3미터 거구 시체의 해부(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58947)'에서 소개한 헌터(John Hunter)의 제자로 런던에서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조용한 시골에서 개업한 평범한 의사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제너가 역사적으로 수시로 인류를 위협했고, 특히 18세기 영국에서 수시로 생명을 위협하던 두창(천연두)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의 주류의사라 할 수 있는 런던의 의사들은 선뜻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너처럼 평범한 의사가 어떻게 이런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지?'

상대성원리를 발견하여 당대 최고의 위치에 오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도 학계 후배인 보어(Niels Bohr)가 양자 이론을 발표하자 수많은 트집을 잡아가면서 이를 비판했다. 보어도 제너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업적을 인정받아 죽기 전에 최고의 학자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세균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19세기 중반, 분만 후에 발생하는 산욕열(산모가 분만할 때 생긴 상처를 통해 감염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이 침입하여 발생하는 열성 질환)은 산모를 돌보는 의사들이 손을 씻으면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제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는 옳은 주장을 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신병 환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제너의 업적은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받아들여졌고, 제멜바이스의 업적은 영국의 리스터(Joseph Lister)가 수많은 반대 이론을 이겨낸 후에야 함께 인정받을 수 있었다.

세상을 바꿀 만한 창의적인 발견을 하는 경우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반대이론에 부딪히게 된다.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자신들이 옳다고 믿어온 내용이 자신의 오류임을 인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학자들은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이유다.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19세기 초반 서구 국가 간호사의 모습. 위키미디어 제공

● 수술이 발전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

1900년이 될 때까지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인류를 수시로 공포에 몰아넣던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백신은 겨우 4가지만 만들어졌을 뿐이고, 일부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온 약초가 약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구조와 작용기전이 알려진 물질은 1820년에 구조가 알려진 키니네 등 몇 개밖에 없었다. 다행히 수술방법은 꾸준히 발전했으므로 총을 비롯하여 많은 치명적 무기가 개발되었지만 치료법도 함께 발전하고 있었다.

수술은 사람의 몸에 상처를 내어 몸 속으로 들어간 다음 병이 생긴 부위를 잘라냄으로써 치료를 하는 방법이다. 수술부위에 따라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있으므로 수술이 쉽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마취를 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마취법은 1840년대에 처음 발견된 후 새로운 마취제가 계속 발견됨으로써 수술이 한층 쉬워졌다. 

수술 후 상처가 생기면 그 부위에 흐르는 혈관을 통해 사람에게서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이 침입하여 2차 감염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다. 이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수술도구와 수술실을 무균처리하여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제거한 후에 수술을 시행해야 한다.

1865년에 영국의 리스터는 수술실을 무균처리하는 법을 발견했다. 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리스터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그 방법을 주변 의사들에게 계속 설득함으로써 결국 그의 무균처리법이 수술실에서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리스터에 앞서서 제멜바이스는 손을 씻는 것만으로도 산욕열을 예방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제멜바이스는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는데 리스터는 인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헝가리 제멜바이스대 회의실에 전시된 산과 의학자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의 초상화. 이 회의실은 제멜바이스대가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한번 결정된 사안은 뒤집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예병일 제공

● 치명적인 산욕열을 예방할 수 있는 쉬운 방법

오늘날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는 1872년에 부다와 페스트가 합병한 도시다. 1818년에 부다에서 태어난 제멜바이스는 페스트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중간에 생각을 바꾸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다.

의사가 된 제멜바이스가 비엔나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에서 근무하던 1840년대에는 아기를 낳은 후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산욕열의 폐해가 심했다. 이 때 제멜바이스는 아주 흥미로운 발견을 했다. 

이 산부인과 병원 두 개의 병동에 분만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두 병동은 서로 가까웠으며 산모의 사망률 자료를 조사해 본 결과 1841년부터 1846년까지 제1병동에서는 9.9%였으나 제2병동에서는 3.4%였다. 

왜 이렇게 3배나 차이가 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두 병동을 비교한 결과 제1병동에서는 의사와 의과대학생이 주로 산모를 돌보고 있었고, 제2병동에서는 교육보다는 경험으로 산모를 돌보던 조산원들이 산모를 돌보고 있었다. 

’의사보다 조산원들이 돌보는 경우 산모의 사망률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제멜바이스의 관찰 결과 의사들은 시체, 환자, 의료기구와 접한 후에 곧장 분만실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음을 알아냈다. 미생물이 감염원이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중세 이후 위생의 중요성은 어렴풋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제멜바이스는 분만실 출입시 손과 의료장비를 씻으라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1848년에 그 병원에서 처음으로 제1병동에서 산모 사망률이 제2병동보다 낮아졌다.

1950년에 헝가리로 돌아온 그는 페스트의 세인트로쿠스(Szent Rókus)병원에서 산욕열 등 의학 연구를 재개했다. 그는 손을 씻는 것과 같이 소독이 산욕열로 인한 사망률 감소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하여 1861년에 '산욕열의 원인, 개념과 예방' 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리스터가 수술실을 무균처리하면 수술 후 발생하는 이차감염을 예방할 수 있음을 발표하기 4년 전이었으며,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관찰하는 일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헝가리 제멜바이스대 교정에 설치된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의 흉상. 예병일 제공

● 위대한 발견이 부드럽게 인정받기 위한 조건

산모를 돌보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멜바이스가 1847년 5월에 분만병동 출입시 손을 비누, 솔, 염소 등으로 소독하도록 조치하자 산모의 사망률은 곧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직후인 1848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자유주의를 희망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제멜바이스도 여기에 동참했다. 

제멜바이스의 조치에 의해 산부인과에서 산욕열의 폐해는 줄어들었지만 제멜바이스의 정치적 행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한 병원 상급자와 마찰이 생겨 제멜바이스는 1950년에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10여 년간 연구를 거듭한 결과가 1861년에 발표한 책이었다. 당시에는 유럽의 많은 산부인과에서 산욕열 환자가 넘쳐나고 있었다. 짧은 기간을 대상으로 한 통계자료는 30%의 산모가 아기를 낳은 후 산욕열에 의해 사망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산욕열이 큰 문제였으니 제멜바이스가 제안한 아주 간단한 방법은 그의 이론을 믿지 않더라도 따라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러나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유럽의 의사들은 제멜바이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럽에서 부다페스트는 비엔나와 달리 중심지가 아니었고, 제멜바이스가 영향력이 큰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850년에 헝가리로 돌아가는 대신 상급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오스트리아에서 계속 일하면서 논문을 발표했다면 더 일찍 인정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제멜바이스는 설득력을 지닌 의사가 아니었다.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결과가 무시당하자 제멜바이스는 산부인과 의사들이라는 집단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동안 너희들이 해 온 방법이 잘못되었으므로 산욕열에 대한 피해가 컸던 거야. 이제부터 내 말을 들어. 아주 쉬운 방법으로 산욕열을 줄일 수 있어’와 같은 제멜바이스의 태도는 보수적인 산부인과 의사 집단을 설득할 수 없었다.

원만한 성격이 아니라 자기 주장이 강했던 제멜바이스의 성격은 점차 황폐해져 갔다. 비엔나에서 일할 때부터 옳은 주장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에 의해 무시당하기를 반복한 제멜바이스는 1865년 친구들에 의해 정신병 환자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다. 그리고 2주일이 지난 1865년 8월 13일에 손가락 상처에 의한 봉와직염이 패혈증으로 발전하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같은 해에 영국에서 무균처리법을 주장한 리스터의 주장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리스터는 제멜바이스처럼 주류 집단과 싸우는 대신 계속된 연구로 더 좋은 방법을 찾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래지 않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리스터는 훗날 자신의 발견에 앞서 제멜바이스가 발견한 내용도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산욕열에 대한 자신의 업적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대신 더 깊이 있는 감염병 연구를 진행했다면 제멜바이스는 더 오래 살면서 더 좋은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다페스트에서 그가 살던 집은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1769년 테레사(Maria Theresa) 여왕이 나기스좀바트(Nagyszombat) 대학교(현재 슬로바키아의 Trnava)에 의학부를 추가하면서 시작된, 현재 부다페스트에 있는 의학대학교는 1969년에 그의 이름을 넣어 현재는 제멜바이스대학교(Semmelweis University-Medicine and Health Sciences)라 불리고 있다.

헝가리 제멜바이스대의 현판.  예병일 제공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교수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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