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피해자 도식을 넘어[박이대승의 소수관점](24)

입력 2023. 3. 28.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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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야기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 전체가 ‘가해자 vs 피해자’라는 도식으로 환원된다. 이 도식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학교 폭력, 성폭력, 직장 내 괴롭힘, 아동 학대같이 개인이 개인에게 가하는 직접적 폭력은 물론 노동 사고, 대규모 참사, 전쟁 범죄, 식민주의적 착취같이 개인적 수준을 벗어난 사건에도 적용된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객관적 구조의 실종

폭력 사건에는 당연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지만, 사건 전체를 이 두 행위자 사이의 상호관계로 환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건은 폭력을 용인하거나 방조하는 객관적 구조와 환경 아래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학교 폭력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학교라는 폐쇄적 사회관계, 교육 제도가 만든 폭력적 구조, 사회경제적 불평등, 괴롭힘과 학대를 사회적 관계의 하나로 활용하는 가학적 문화 등이 개입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은 오로지 사람의 형태로 구현된 요소에만 집중한다. 즉 비인격적 구조와 환경을 시야에서 지우고, 사건의 모든 요소를 인격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도식에서 정의(justice)는 두 행위자 간의 부채 관계를 청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보상하거나, 피해자의 고통에 상응하는 고통을 되돌려받는 방식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정의 구현은 늘 복수극의 형식으로 실현된다. 폭력의 구조나 환경을 어떻게 바꿀지는 핵심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의 형태가 아니고, 그 자체로 처벌이나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피해자 도식은 오로지 복수극의 등장인물이 될 수 있는 인격적 요소만을 다룬다.

이 도식은 복수극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폭력 역시 그에 따라 처리된다. 학교 폭력의 대응책은 폭력적 구조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학폭 가해자가 되면 대학에 못 간다’는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폭력이 발생하면, 조직의 문제는 그대로 두고 가해자만 적당히 잘라낸다. 물론 이런 식의 제재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고, 설사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했다고 해도 폭력적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결국 폭력은 재생산되고, 또 다른 사건이 뒤를 잇는다.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사이다 복수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규모 참사는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있는 사건이다. 피해자가 죽고 다친 원인은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은 책임자와 조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한 안전 시스템에 있지만, 이것들을 가해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건을 가해자-피해자 도식으로 접근하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된다. 누군가는 가해자가 없으니 피해자도 없다고 주장한다. 죽은 이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운 없이 사고를 당한 개인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안전 담당자들을 가해자의 자리에 올려놓으려 한다. 두 경우 모두 ‘가해자 없는 피해자’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규모 참사의 핵심은 구조, 시스템, 환경 같은 비인격적 실체 때문에 죽음의 위험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있다. 담당자의 과실은 단순히 인간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안전 시스템의 구성 요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가해자-피해자 도식은 참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방해한다.

놀랍게도 한국은 한일관계 역시 이러한 도식으로 접근해왔다.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단순히 진심 어린 사과와 배상을 했는지 아닌지에 있지 않다. 전후 유럽의 문제는 가해국과 피해국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실현하고 파시즘과 결별한 새로운 유럽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전쟁 범죄 가해자에 대한 처벌, 피해자에 사과와 배상은 이러한 질서를 위한 중간 단계일 뿐이다. 일본의 문제는 단순히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 및 제국주의와 결정적으로 결별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한국은 어떻게 반파시즘적, 반제국주의적, 평화적 동아시아 질서를 수립할 것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고, 가해국과 피해국의 상호관계에만 집중한다. 반성, 사죄, 배상은 일본에 요구해야 할 최소치다. 최대치의 요구를 위해서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에서 벗어나 객관적 국제 질서를 사고해야 한다.

공동체의 실종

누군가는 이 칼럼을 보고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냐?”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실제로 가해자 입장에서는 이 칼럼이 반가울 것이다. 자신에 대한 증오와 공격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좋아하든 말든,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가해자-피해자 도식에 갇힌 사람의 눈에는 오로지 행위자들만 보인다. 폭력을 용인하는 구조와 환경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사건 처리를 위한 제도와 공동체의 역할도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폭력적 사건이 발생하면 모든 문제를 가해자 진영과 피해자 진영의 대결로 몰고 간다.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가해자는 처벌을 받거나 받지 않을 수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기도 한다. 피해자 진영이 가해자 진영을 압도하는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강력한 처벌이 가능하다. 이것이 실제로 학교 폭력이 다뤄지는 방식 아닌가? 유명인이 학교 폭력 가해자라는 것이 밝혀져 대중의 분노가 터져 나오는 상황이 아니라면, 가해자에게 반성과 사죄를 요구할 다른 방법이 있는가?

인간을 향한 폭력은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한 것이므로 모든 시민이 관심을 가지고 개입할 의무가 있다. 가해자-피해자 도식에는 이러한 공동체의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3자는 공동체의 시민이 아니라 관전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지지하고 가해자를 비난할 뿐이다. 이러한 도식은 가해자에게 불리하고 피해자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피해자의 침묵을 요구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피해자는 자신을 지지해 줄 제3자가 확보되지 않으면, 피해 사실 자체를 폭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지지자들은 변덕이 매우 심해 상황이 조금만 달라져도 공격의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린다. 이것이 지금 한국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처한 상황 아닌가?

인간이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국가기구가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며,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정당한 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은 가해자의 죗값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행위자들이 놓여 있는 구조와 환경을 문제 삼고 객관적 규범에 따라 폭력을 다루지 않는 한, 그 죗값을 받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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