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의 하나일 뿐”… ‘마음의 병’ 나누고 치료하는 MZ세대들 [심층기획]

김나현 입력 2023. 3. 28. 06:05 수정 2023. 3. 2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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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치료 달라진 인식
SNS 등 정보 확산… 치료 진입장벽 ↓
2030 女 ADHD 환자 4년간 7배 급증
직장서 밝혀 행정업무 부담 줄이기도
취업·승진·보험가입 악영향 오해 여전
본인 동의 없인 진료 기록 열람 못해
“정신과 방문 미루면 골든타임 놓쳐”
“정신과 약을 밥 먹듯 먹는 쟤가 사장 자격이 있어?”

지난달 26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대행사’에서 극 중 ‘여성 최초 대표’ 타이틀을 거머쥔 고아인(이보영 분)을 향해 경쟁 관계의 임원이 소리친 말이다. 라이벌을 깎아내리기 위해 내지른 고함이었지만, 오히려 직원들은 “말씀대로라면 3년째 정신과 약을 먹고 있는 저도 일할 자격이 없냐”며 너도나도 정신과 상담 경험을 고백한다. 드라마는 실시간으로 대중과 호흡을 맞추며 변화한 사회상을 빠르게 반영한다. 이 장면이 판타지가 아닌 이유다.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듯,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를 찾고 치료 과정을 주변에 적극 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격리해야 하는 병, 특이한 사람만 걸리는 병이란 사회적 낙인 때문에 정신과 방문을 꺼리고, 방문하더라도 치료 사실을 숨기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정신과 기록이 남아 취업·승진 등에서 손해 볼지 모른다는 우려도 여전히 공존한다. 정신질환을 둘러싼 인식 전환이 아직은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년층 ‘참는 게 능사 아냐’… 낮아진 장벽

27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주요 정신과 증상으로 의료 기관을 찾는 환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17년 대비 2021년 정신과 증상별 환자 증가율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87%로 가장 높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57%), 공황장애(53%), 강박장애(37%), 우울증(34%)이 뒤를 이었다. ADHD의 경우 20∼30대 여성 환자가 2017년 1922명에서 2021년 1만3549명으로 7배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정신과 방문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진 결과로 분석한다. 이병철 한림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없는 병이 새로 생겼다기보다 기존에도 증상이 있었지만 치료받지 않다가 이제 받는 경우”라며 “젊은 층은 ‘참는 게 능사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방송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정신질환을 다양하게 다루게 된 현실, 정신과 정보 접근성이 좋아진 것 등도 한몫했다. 최근 정신과에 방문했다는 윤모(25)씨는 오은영 박사가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성인 ADHD 정보를 접하고, 유튜브로 정신과 의사의 채널을 살펴본 뒤 병원을 찾은 사례다. 지난해 인턴 생활을 시작하며 문단이 순서대로 안 읽히는 등 낮은 집중력이 업무상 불편함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윤씨는 정신과에 가 성인 ADHD 진단을 받고 오히려 후련해졌다고 전했다. 그가 즐겨보는 정신과 의사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100만명에 이른다. 채널에 올라온 영상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영상 보고 용기 낸다’, ‘나도 내일 초진 간다’ 같은 댓글을 남겼다.

이런 분위기 속 청년들 사이에서는 정신과 방문을 당당히 밝히고,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는 문화도 나타나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 조모(28)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정신과 약을 먹었고, 정신상담센터에는 주 1회씩 방문하면서 이 사실을 직장과 동료들에게 알렸다. 덕분에 올해에는 행정 업무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주말·밤낮 가리지 않고 연락하는 학부모들을 상대하며 우울감에 시달렸지만, 주기적 상담과 학교 측 배려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영업관리 직군에 종사하는 정모(32)씨도 과도한 실적 압박과 업무 스트레스로 지난 여름 발생한 공황장애에 대해 솔직히 상사에게 털어놨다. 정씨는 “정신병은 어느 날 길을 걷다 갑자기 차에 치이듯 갑작스레 찾아온다”며 “상사와 오랜 시간 대화를 통해 업무 분장을 새로 했다”고 밝혔다.

◆여전한 사회적 편견… ‘혹시 손해 볼까’ 걱정

정신과 치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 편견들로 환자들의 치료가 늦어진다고 우려했다. ‘정신과 기록이 향후 취업·승진·보험 가입 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오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신과 진료 기록은 민감한 개인정보로, 본인의 동의 없이 누구도 열람할 수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환자 본인이 전체 공개로 정신과 진료 기록을 발급받아 직접 제출하지 않는 이상 공단은 제3자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대기업 인사팀 복리후생 담당 김모(29)씨는 이에 “의료비 지원을 받기 위해 지정병원에서 진료를 받지만 그 기록은 본인만 접근할 수 있고 원치 않으면 회사가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대기업이나 복리후생으로 직원들 병원비를 보조해주는 회사는 그 복리후생 내역으로 알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를 감안해 일부 직원은 아예 병원비를 신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특별히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가볍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임명호 안성시 정신건강복지센터장은 “정신과 방문을 기피하면 만성화하거나 치료받을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연도별 극단적 선택 현황에 따르면 ‘정신적·정신과적 문제’를 이유로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은 2021년 5258명으로 전체(1만3205명)의 40%에 달했다.

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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