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No Japan? 지금은 일본 활용하는 배포를 가져야

구승환 교토산업대 교수 입력 2023. 3.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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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3월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뉴스1

12년 만의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16일 아침, 도쿄 오다이바는 국제전시장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5~17일 3일간 개최된 신재생에너지 기술 전시회를 찾은 인파였다. 이곳에서 한국 기업 관계자를 만났다. 참가 동기를 물었더니 일본 기업이 소재·부품·장치 분야에서 강하기 때문에 함께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본의 소재·부품·장치 분야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니다. 냉전 종식 이후 전개된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체제를 거치며 30여 년간 축적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자원과 인재 조달 등 최적 선택지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이 구축됐고, 일본의 소부장 산업도 그 결과의 일부인 것이다. 반도체는 철저히 국제 분업화된 산업이다. 600개 이상 공정을 거쳐야 하고, 각 공정에는 수많은 장치와 화학 물질, 재료가 투입된다. 모든 것들이 세밀하고 오차 없이 조합을 이루어야만 고품질의 반도체가 얻어진다. 미국과 네덜란드, 일본 등의 장비와 부품, 소재, 그리고 한국의 공정 및 제조 기술 간 완벽한 결합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거나 획득되기 어렵다. 경험을 통해 학습된 노하우의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용 등의 이유로 장치나 재료를 섣불리 바꾸지 못한다.

글로벌 공급망은 고도로 구조화된 동시에 매우 복잡한 거미줄과도 같아서, 단일 국가 내에서 완결된 공급망을 형성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는 미·중 패권 경쟁 사이에서 새로운 진영 논리와 자국우선주의에 입각한 세계 경제질서 재편기의 한가운데 서있다. 미·중 경쟁은 단순한 군사적 대립이나 정치적 편가르기에 그치지 않고 미래 핵심 성장산업과 관련된 공급망에서 상대를 배제하겠다는 의도를 두고 전개되고 있는데, 그 핵심에 반도체가 있다. 미국이 한국과 대만, 일본과 함께 결성한 칩4 동맹에서 그 구체적이고도 노골적인 목표를 읽을 수 있다. 이는 곧, 국제분업구조 체제하에서 반도체를 위시한 ICT 산업에 힘입어 현재의 위상까지 급성장한 수혜국 중 하나인 한국에 새로운 도전의 시기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압력에 맞서 지금까지의 국가 간 관계를 새롭게 들여다보고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의 산업구조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기업 활동이 경제적 논리를 넘어서 정치, 외교, 군사 등의 논리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속에서 더욱 민감하게 미국과 중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공급망 글로벌화와 블록화라는 두 모순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시기, 한국은 앞으로 어디에 중심을 두고 전략을 짜야 할까? 물론 장기적으로는 국내에 완결된 구조를 구축해 공급망 재편에 대응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일본이 수십년간 경쟁우위를 축적해온 소부장 분야 기술력과 노하우를 단기간에 추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소부장 국산화”는 듣기에는 참으로 좋은 구호일지 모르겠으나, 섣불리 추진하다가는 우리 산업에 대한 자해행위가 될 수도 있다. 서서히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소부장 공급망이 양과 질 측면에서 일본을 추월할 때까지는 한일 간의 상호 의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국의 미래가 있다.

비메모리반도체 분야와 자율주행, 배터리, 수소에너지, 로봇, 인공지능, 항공우주산업, 양자컴퓨팅 등에서 무궁무진한 혁신이 일어나고 있고, 이들 분야를 주도하는 국가가 미래 산업 패권을 쥐게 될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본은 이 산업 분야에서 아직은 우리보다 앞서고 있는 영역이 많다. 새로운 기술 및 산업의 지평이 열리는 지금, 미래를 위해 일본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 경합하는 영역에서는 치열하게 경합해 반드시 이겨내고, 함께해야 하는 영역에서는 많이 배워야 한다. 이것이 한일 의존성을 부인할 수 없는 지금, 지속성장과 미래 산업패권을 위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슬기로운 해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번 한일 정상회의는 기업들이 더 이상 정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일본과 협력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줬다는 의미를 갖는다.

한국과 일본은 가장 많은 관광객이 서로 오가는 국가이다. 양국 20~30대가 가장 방문해 보고 싶은 나라도 각각 한국과 일본이라고 한다. 슬램덩크에 한국 관객들이 열광하고, 한국 아이돌은 일본에서도 한국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는다. 여전히 일본은 우리의 적인가, 아니면 미운 구석은 있지만 친하게 지내야 할 친구인가. 우리 역사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도 단지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을 싫어할 뿐이지, 일본과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관념적인 자주성에 빠져 일본을 배척하는 것과, 양국 간 상호의존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해 일본을 활용할 수 있는 배포를 가지는 것 중 무엇이 우리에게 더 득이 되는지를 냉정히 생각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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