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 수학의 언어로 쓰인 풍경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동안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첼로 선율이 들려왔다.” 대부분 이 문장을 읽으며 붉은색과 음악 소리를 떠올린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물리학자들에게도 수식은 언어와 똑같은 기능을 한다. 습득 과정이 어렵기는 하지만 수학이라는 낯선 언어에 익숙해진다면 글 읽기와 다르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즉, ‘사과’라는 글자를 통해 맛깔스러운 동그란 형상이 떠오르듯 수식도 의미와 풍경을 소환시킨다.
한편 언어의 기표는 다채로운 의미로 파생될 수 있는 모호성도 존재한다. 그래서 읽기의 경험은 매번 달라질 수 있다. 빙산 아래 얼음 조각들이 떠오르듯 글을 읽을 때마다 숨겨진 의미들이 새롭게 등장할 수 있다. 특히 시를 읽을 때 그렇다. 앞마당에 핀 해바라기꽃을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사막의 태양 탓을 하며 깊은 바다로 잠수해 입을 닫는다. 이렇게 처음 시를 읽는 동안은 완전한 형태를 알기 어려운 부분적 이미지만 떠오르거나, 개연성을 찾기 어려운 도약과 분절적 심상에 대한 피로감에 시집을 덮어 버리기 쉽다.
하지만 살다 보면 시시콜콜 말하기조차 힘든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복잡하게 뒤얽혀 길을 찾을 수 없고, 막막함과 불안으로 가득한 마음의 풍경을 몇 개의 단어와 문장에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세월에 숙성된 후 다시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철없던 시절에는 의미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던 시의 언어들이 어둠 속 촛불처럼 하나씩 켜지는 순간 비로소 꽃에서 시작해 사막의 열기와 깊은 바다의 고독으로 잠수한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지며 시와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물리학의 수식도 그렇다. 흔히 수식을 단 하나의 기계적 작동을 요구하는 코딩 명령어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더하고 빼고 미분하고 적분하라는 명확한 의미를 담은 수식에 다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해 보이는 물리 공식의 이면에는 수많은 심상이 응축되어 있다. 우주 어느 곳에서든 작동하는 보편적 법칙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물리학자는 시인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그 경험을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리책의 수식 읽기는 그 배후에 감춰진 사유의 여정을 복원해 내는 과정이다.
가령, F=ma는 단순히 힘(F)이 질량(m)과 가속도(a)의 곱이라는 진술로 끝나지 않는다. 힘이 속도 변화의 원인이라면 힘의 부재(F=0)는 속도의 불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외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는 멈춰있는 정적 상태뿐만 아니라 일정 속도로 움직이는 동적 상태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등속을 지속하는 원인이 물체의 외부가 아닌 내적 특성에 있는 셈이다. 반면 힘을 강하게 혹은 약하게 변화시키면 가속도가 변한다. 그러나 변하는 둘의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된다(F/a=m). 즉, 질량은 변하는 둘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고유성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운동의 주체가 지닌 직선 운동의 고유성은 질량(m)과 속도(v)로 표현되며 둘의 곱인 운동량(mv)을 통해 관성의 고집스러운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번에는 F=ma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보자. 가속도는 힘을 유발할 수 있을까? 비행기 안에서 내 몸을 움직이던 보이지 않는 힘은 나를 품은 비행기의 가속도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사과를 당기는 지구의 중력도 가속도를 지녀야 하며 비행기의 가속이 만든 힘과 중력은 다르지 않다. F=ma라는 수식 하나에 대한 사색만으로도 다양한 물리적 풍경이 소환된다.
일상 언어의 파생적 특성처럼 물리학 수식은 때론 물질적 대상을 넘어설 수 있다. ‘힘’과 ‘운동’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의 영역은 얼마나 넓은가? 그것은 권력에 맞선 사회적 투쟁일 수 있고, 연주자의 근력에 응답하는 악기의 미세한 떨림일 수 있으며, 개인의 마음속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욕망의 모습일 수도 있다. 고집스러운 관성에 맞서 긴 세월에 걸쳐 바뀐 내 삶의 운동량 변화는 얼마일까? 물리학 수식들도 시를 읽듯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해서 읽어보자. 어느 날 수식이 말을 걸며 놀라운 풍경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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