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안락지대’ 먼저 깬 한국

정시행 뉴욕 특파원 2023. 3. 2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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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대통령실

영미권에서 개인과 조직의 혁신을 이야기할 때 ‘안락지대(comfort zone)’란 말을 자주 쓴다. 안락지대는 편안하고 익숙한 장소나 생활방식, 인간관계, 자신 있는 분야를 뜻하는 심리 용어다. 안락지대는 안정감을 주고 기존의 성공 문법을 이어가게도 하지만 모험과 도전, 성장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란 부정적 의미로 쓰일 때가 더 많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안락지대 내에 있는 ‘익숙한 불행’과 그것을 벗어난 ‘불확실한 행복’ 중 골라야 할 경우 전자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정치·외교 분야에서도 한번 구축된 안락지대는 내부 저항 때문에 깨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선 반일(反日) 감정이 그렇다. 반일은 불행한 역사에 근거한 정당한 정서였지만, 언제부턴가 우리의 지평을 스스로 좁히는 안락지대가 됐다. 커지는 북핵 위협, 중국·러시아 등 권위주의 체제의 블록화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전략을 바꾸기보다는, 100년 전 약소국 식민지의 비애와 울분에 갇혀있기를 바란다. 반일은 정치·도덕적 우위 면에서 여전히 더 편하고 안전한 선택이다.

한일 관계 개선은 급변하는 글로벌 안보·경제 환경에서 우리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 꼬인 매듭 하나를 푸는 것과 같다. 한일 과거사 갈등은 아시아·태평양 안보 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방해하는 골칫거리였다. 자유 진영은 이번 한국의 결단으로 북한 인권과 대량살상무기에 대응한 국제 공조가 단단해질 거라며 반기고 있다. 한국은 향후 한미 안보 협력은 물론 산업·통상 전쟁에서 큰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일본이다. 일본의 숙원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戰犯)이란 오명을 벗고 경제력에 걸맞게 세계 안보질서를 호령하는 강대국 반열에 오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아시아에서 수백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거사 문제만 조용히 덮어지면, 미·일 동맹만 잘 돌아가면 그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단일 강대국이고 군소 국가는 의견 내기도 쉽지 않던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갇힌 착각이다. 현재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독일과 일본이 노리고 있지만, 국제 여론에선 확연한 온도 차가 있다. 독일은 나치 만행을 수없이 사죄한 반면, 일본은 아직도 핵심 정치인들이 A급 전범에 참배한다.

만약 일본이 한국의 여러 전향적 조치에 화답하지 않은 채 ‘이제 과거사는 털었다’고 여긴다면, 자신들의 안락지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은 채 미래의 과실만 따겠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이 원하는 국제적 인정이라는 과실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그들의 몫이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임팩트가 큰 나라다. 한국이 많은 고민 속에 안락지대를 먼저 깨고 나온 것, 그리고 일본도 그럴 수 있도록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용기 있는 리더십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세계는 항상 틀을 깨는 이들을 존경하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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