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학폭 대책이 학폭 원인이 되는 이유

2023. 3. 27.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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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학폭 이력 대입 반영 검토
대학은 학생과 학부모들의 ‘욕망’
해결 과정서 권력자 이기는 게임
학벌주의 미끼 이용 ‘해법’ 안돼

잘못한 아이를 훈육하는 가장 비윤리적인 방식은 아이의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동생 때리면 공룡 장난감 안 사줄 거야.” 이 말은 비윤리적이다. 동생을 때리는 것과 장난감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장난감은 아이의 욕망이고, 부모는 이 욕망을 미끼로 활용했다. 아이에게 욕망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준 것이다. 부모 권력을 이용한 상징적 폭력이다. 아이에게 동생을 때리면 안 된다는 게 학습될까. 아이는 자기 욕망을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더 교묘한 방식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부모의 폭력 방식 또한 학습될 것이다. 자신의 권력과 상대의 욕망을 이용하여 공포를 심어주는 능력이 내면화되는 것이다.

아이가 동생을 때리는 것은 ‘증상’이다. 증상 자체를 없애는 것은 교육의 목표가 아니다. 증상의 원인이 제거돼야 한다. 아이가 동생을 때리는 이유는 질투 때문이다. 질투는 경쟁에서 발생한다.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려는 경쟁, 더 인정받으려는 경쟁. 그 경쟁에서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을 때 자신과 경쟁하는 상대에게 위해를 가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다. 자기 상처에 대한 방어와 보상심리가 동생을 때리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아이의 증상은 자신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껴야 사라진다. 없던 동생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아이에겐 불안이다. 동생의 출생은 당황스러움과 좌절감, 자신을 억제해야 한다는 강박을 준다. “동생 때리면 공룡 장난감 안 사줄 거야”는 거듭 아이의 욕망을 박탈한다. 아이는 더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더 방어적이 되고, 그 방어는 결국 공격이 된다.

학교폭력 이력을 대학입시에 반영하는 대책이 검토되고 있다 한다. 대학은 학생과 학부모의 욕망이다. 학폭에 대한 이 대책은 학생과 학부모의 욕망을 이용한 것이다. 학교는 인정투쟁의 장이다. 학생은 모두 같은 것을 욕망한다. 높은 점수, 수도권, 명문대, 이것은 모두 대학이 계급으로 연결된다는 학벌 이데올로기에서 배태된 욕망이다. 그리고 이 학벌 이데올로기야말로 학폭의 원인이다.

학교 교육은 이미 권력 지향적이다. 학생의 성적표는 미래의 권력이자 계급이다. 성적 서열화 장에서 학생은 권력을 학습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권력을 자기 권력으로 치환시키고, 상징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등장한다. 학벌 이데올로기가 왜곡된 인정투쟁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 투쟁에서 효능감을 맛보게 되면 폭력은 더욱 강화된다. 이런 학폭을 해결하기 위해 ‘대학’이 표상하는 학벌주의를 미끼로 이용하는 것은 학폭의 원인을 더 강화하는 셈이 된다. 결국 학폭 대책이 다시 학폭 원인으로 재귀된다.

학폭 해결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파생되기도 한다. 이것은 피해자에게 n차 가해가 된다. 이 n차 가해의 중심에는 권력을 쥔 가해자의 부모가 있다.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를 하지 않는 이유는 가해자의 소송이 늘어날 것을 우려해서라 한다. 가해자의 소송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 소송 과정에서 피해자가 더 고통받는 것이 문제다. 가해자가 집행정지를 신청하면 피해자는 가해자와 분리조차 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피해자 학생의 부모가 권력이 있고 그 권력으로 가해 학생을 매장하려는 경우, 가해 학생이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이때 극도로 불안해하는 가해 학생에게 심리적 위안을 주려는 교사가 고발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교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교사는 철저히 소외된다. ‘매뉴얼’만 남는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으면 경고나 처벌의 대상이 된다. 상황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경직된 매뉴얼이 유일한 해결책인 양 간주한다. 매뉴얼이 모두를 소외시키고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학폭 사건은 단순히 ‘학폭’으로 범주화될 수 없다. 학폭은 그 해결 과정에서 학폭을 넘어선다. 무능하고 비윤리적인 공권력이 힘없는 피해자 혹은 가해자에게 상징적 폭력을 가한다. 그땐 더 이상 학폭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학폭은 결국 권력의 비대칭 속에서 가해자 피해자 구분이 사라지고 권력자가 이기는 게임이 된다.

늦은 밤, 예닐곱 명 아이들에게 불려 나간 적이 있다. 열한 살 때였다. 아이들은 나를 둘러싸고 선생님에게 고자질한 사실을 자백하라 추궁했다. 당혹스러웠다. 내가 고자질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 중 고자질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내가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리돌림을 했던 아이를 기억한다. 그 아이가 무서웠던 이유는 그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와 그의 힘이 아니라, 나의 부모와 그의 부모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 옆에 주섬주섬 서 있었던 아이들도 이해했다. 어린애에게 방관은 당연한 거였다. 방관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 기제이기 때문이다. 방관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다 판단되면 동조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학폭은 가해자와 피해자 이분법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방관하고 동조한 학생에게도 죄의식과 트라우마가 생긴다.

학교폭력을 ‘근절’하겠다는 것은 환상이다. ‘악’은 진부(banality)한 것이고 어디든 기생할 수 있다. 세계는 그 악을 고발하는 것으로 달라질 수 있다. 정순신 아들의 학폭이 증명될 수 있었던 것도 주위 학생의 증언 때문이었다. 피해자를 살리는 것은 증언이다. 피해자에 대해 의료적 치유보다 증언이 먼저여야 하는 이유다. 연대는 연민과 위로에 있지 않다. 사실을 말하는 것에 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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