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대북송금 특검법’ 참모진-장관들 의견 정반대”

한겨레 2023. 3. 27. 22: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길을 찾아서][길을 찾아서]참여정부 천일야화 8화-대북송금 특검

2003년 2월26일

대통령 취임식 바로 다음날

국회에서 한나라당 주도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북송금 특검법안’이 통과됐다.

3월14일 국무회의장 밖에

4명의 민주당 중진 정치인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촉구하러 와있었지만

한발 늦었다.

“새 정치 바라는

국민의 희망을 꺾을 수 없다”

특검 수용 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의 어조는 비장했다.

2003년 3월14일 오후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마치자마자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북송금 특검법 수용’을 발표하고 있다. 뒷쪽으로 유인태 정무수석·문재인 민정수석·이정우 정책실장·문희상 비서실장 등이 보인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7회에서 ‘늘공’의 경제 부처와 ‘어공’의 사회 부처 장관 인선이 대조적이라고 썼는데, 다른 부처를 보자. 법무부 강금실, 행정자치부 김두관 장관은 예상을 깬 인사였다. 종래 주로 검찰 출신이 법무부 장관을 맡아온 관례에 비하면 판사 출신 여성 법무부 장관은 파격적이었다. 강금실 장관은 2003년 3월9일 대통령의 파격적인 ‘전국 검사와의 대화’에 배석했다. 파격 대통령, 파격 장관, 파격 대화였다. 젊은 평검사들은 기고만장하고 무례했다. 김두관 장관 임명은 남해군수 출신 행자부 장관이란 점에서 역시 전례를 찾기 힘든 파격이었다.

2003년 3월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를 텔레비전 생중계로 진행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3년 2월26일(수) 대통령 취임식 바로 다음날 국회에서 한나라당 주도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된 ‘대북송금 특검법안’이 통과됐다. 이 문제는 참여정부가 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친 최대의 난제이자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2월27일(목) 아침 수석회의에서 박주현 국민참여수석이 이 문제를 보고했다. 박 수석은 “2주간의 시간이 있으니 여론 추이를 보자. 여야 합의는 불가능하고, 거부권 행사 가능성을 시사하되 행사는 자제함이 옳겠다”고 말했다.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은 특검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고, 대북관계 투명성 제고, 외국의 신뢰 상승 효과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이미지가 걱정이고 외교상 부담을 남겨 유감이다. 국회 결정을 존중하되 여야가 수사 범위를 합의하면 특검이 존중하지 않겠느냐. 사건의 성격을 보면,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고 대통령 뒤에 숨어서 이용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다”고 말했다.

2003년 2월26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 단독으로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앞서 민주당 의원들이 박관용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이날 낮 12시 대통령·총리·비서실장·국가안보보좌관, 그리고 정책실장 5인이 청와대 본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노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에 대해 의견을 묻자 고건 총리는 답변하기가 곤란한지 침묵을 지켰다. 대통령은 “새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희망을 꺾는 게 되기 때문에 거부권 행사가 참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인수위원 다면평가 결과가 나왔는데, 이정우 실장이 모든 분야에서 1위를 했습니다”라고 알려줘 깜짝 놀랐다. 다면평가는 상명대 전기정(나중에 청와대 업무과정개선-PPR 비서관) 교수의 작품이다. 리더십, 책임감, 성실성, 창의력 등 분야별로 인수위원들이 상호 평가하는데, 상대평가라서 다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다. 두 달간 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을 두고 구태여 우열을 가리자니 인간적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이런 평가는 참 미국적 방식이구나 싶었다.

3월3일(월)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 문제에 대해 참모들의 의견을 구했다. 문재인 민정수석과 박주현 국민참여수석은 “국내 위법은 철저히 조사하되 대북송금 부분은 비공개로 한다”는 의견을 냈다. 나도 이 주장에 동조하면서 ‘지는 길이 이기는 길’이라고 하며 수용을 주장했다. 유인태 정무수석은 종교 지도자 회합과 제한적 특검 수용 의견을 냈다. 대통령은 결론을 유보한 채 “덮자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냐?”라고 반문했다. 3월5일(수) 오전 9시 수석회의에서 대북송금 특검 문제가 또다시 논의됐다. 유 정무수석이 보고하기를, 특검에 대해 민주당 국회의원의 7할은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의견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 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거부권 행사에 대해 찬성 31%·중립 32%·반대 37%로 거의 3등분으로 나타나 민주당 의원들과는 생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날 오후에 권오규 정책수석, 조윤제 경제보좌관과 함께 대통령 보고를 했다. 국제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다음 주초에 각국 신용평가회의를 여는데, 한국을 현행 ‘A-’에서 ‘Baa1’로 강등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북핵 위기. 평가 한 등급 인하에 금리 0.2% 상승 효과가 있고, 금액으로는 5억 달러 손실이 발생한다고 한다.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과 의논 끝에 반기문 외교보좌관과 재경부 대표단을 미국, 홍콩에 파견해서 설명하기로 했다.(그런 노력 덕분인지 3월13일 무디스는 한국 신용등급 현상유지를 결정했다. 이 평가는 국내 언론 보도와 여론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보고 뒤 복도로 나오며 대통령이 나를 보고 “윤덕홍이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묻기에 복도에서 길게 설명할 수도 없고 해서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내친김에 금감위원장에 이동걸 박사를 추천했더니 대통령이 웃으며 “이정우사단 형성”이라고 농담을 했다.

3월11일(화) 오전 국무회의가 끝난 뒤 고건 총리의 대통령 주례보고에 배석했다. ‘총리실 차관 2명 신설안’을 가져왔기에 나는 과다하다고 반대했다. 7회에서도 얘기했듯이, 나는 총리실의 비대화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일을 많이 맡기면 된다고 하며 선선히 허락해주었다. 여성, 청소년심의관 등 3자리 신설 결론이 났다. 내가 청소년심의관은 기존 청소년위원회와 중복된다고 다시 지적하니 고 총리는 “한번 알아보겠다”고 했다.

3월13일(목) 오후 정찬용 인사보좌관, 이동걸과 함께 관저로 가서 금감위원장 인선을 의논했다. 며칠 전 내가 공정위, 금감위에 개혁파 기용을 건의했을 때 노 대통령은 “칼은 뽑지 않고 칼집에 넣은 채 조용히 개혁하는 것이 낫다”, “관료라고 해서 반드시 반개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금감위원장 최종 후보는 전 재경부 차관 이정재, 그리고 개혁파 학자 이동걸로 좁혀졌다. 대통령은 전자로 가면 국민이 안심할 것이고, 후자로 가면 생소해서 혹시 불안해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일단 정책실장이 두 사람을 만나보라고 지시했다. 오후 6시부터 대통령 관저에서 실장, 수석의 만찬이 있었다. 주로 경제 불안과 특검이 화제였다. 참석한 참모들 중에서 특검 수용파가 나를 포함해 6명, 거부파가 2명이었다. 만찬이 끝난 뒤 나는 이정재, 이동걸과의 ‘3이’ 심야회동을 위해 마포의 가든호텔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2003년 3월14일 오후 5시 임시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왼쪽)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법 수용’을 발표했다. 노무현사료관

3월14일(금) 아침 대통령에게 어제 심야회동 결과를 보고하고, 금감위원장 이정재·부위원장 이동걸로 가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다. 이날오후 5시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이정재 금감위원장, 송광수 검찰총장 안이 통과됐다. 이어서 다시 대북송금 특검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특검에 대해 거부를 주장한 장관이 5명 있었고, 수용을 주장한 장관은 1명밖에 없어 청와대 수석들의 의견과는 정반대 분포를 보였다.

노 대통령은 토론 종결을 요청하고는, 링컨이 어느 날 국무회의에서 장관 전원이 반대했으나 자신의 의지대로 원안을 통과시켰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노 대통령은 링컨 전기의 저자다. <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대학을 안 나온 변호사, 발명특허 출원, 토론을 좋아함, 낙선과 실패의 연속, 예상을 깨고 대통령 당선, 16대 대통령 등등.)

2001년 12월10일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 겸 후원회에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고문이 16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고 있다. 노무현사료관

이 때 국무회의장 밖에는 4명의 중진 정치인-김원기·정대철·이상수·이낙연-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촉구하러 와있었지만 한발 늦었다. 바로 춘추관에 가서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겠다는 대통령 기자회견에 배석했다. 대통령의 어조는 비장했고, 연설에 감동적 대목이 있었다.

이로써 참여정부 첫 2주간 뜨거운 감자였던 문제가 일단락됐다. 안타깝게도 이때부터 참여정부와 동교동 사이에 냉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 노 대통령이 여러 날을 고심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총리·장관·수석들의 의견을 묻고 또 묻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고뇌에 찬 대통령의 결정이 옳은 방향으로 내려졌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새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희망을 꺾을 수 없다’는 노 대통령의 말이 천금의 무게로 다가왔다.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