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여당의 동양평화론 아전인수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미완성 원고로 남아 있다. 뤼순 감옥에서 이 책을 쓰기 위해 1910년 3월26일로 잡힌 사형 집행을 보름가량 연기해달라 한 안 의사의 요청을 일본이 묵살했다. 그는 애초 서문(序文)·전감(前鑑)·현상(現狀)·복선(伏線)·문답(問答) 5개 장으로 책을 구상했지만 서문과 전감 일부만 쓸 수 있었다. 그나마 친필 원고는 남아 있지 않고, 일본인들의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온다. 그 핵심은 동양평화의 한 축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일본이 조선과 청을 침략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을 비판한 것이다.
안 의사가 미처 쓰지 못한 부분은 당시 일본 법관이 그로부터 들은 내용을 기록한 청취서 등으로 유추해야 한다. 연구자들은 뤼순 중립지대화를 통한 분쟁 방지, 한·중·일 3국 공동 은행·화폐 도입, 3국 군사협력, 3국 대표의 교황청 파견·협력 맹세 등으로 그 내용을 정리했다. 안 의사가 초기에 동학농민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당시 정세를 황인·백인의 인종 대결 구도로 본 것 등에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일본의 침략 세력이 서양 제국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러한 안 의사 사상은 이후 항일투쟁의 이념적 기초가 됐고, 민주화 이후 정부들의 한반도 평화체제, 동북아 평화구상에도 영감의 원천이 됐다.
국민의힘이 지난 26일 안 의사 순국 113주년을 맞아 낸 논평에서 “안 의사는 제국주의 시대 일본마저 동양평화를 위해 협력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며 “안 의사의 정신을 기린다면, 북한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이때 일본과의 협력을 한층 강화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밝혔다. 동양평화론의 방점은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으로 나아가며 동양평화 대의를 저버린 걸 경계한 데 있다. 113년 전 일본과 지금의 일본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안 의사가 경계한 제국주의 침략 역사를 더 이상 제대로 기억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한·일 협력’을 하는 것이 동양평화론 정신에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다수 시민의 뜻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마무리지은 강제동원 3자 배상안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여당이 동양평화론까지 아전인수식으로 이용하려는 행태가 개탄스럽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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