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을 응원하는 작은 배려

한겨레 2023. 3. 27. 18: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숨&결]

이기일 보건복지부 차관이 지난해 11월17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자립준비청년 지원 보완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숨&결] 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7년 전 이야기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숙사에서 나오게 돼 급하게 구한 월셋집 보증금은 자그마치 500만원이었다. 그 큰돈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보육원 퇴소 전 자립전담요원 선생님이 알려줘 가입했던 디딤씨앗통장이 떠올랐다.

디딤씨앗통장이란 국가가 운영하는 아동발달지원계좌(CDA) 지원사업 이름이다. 아동양육시설, 공동생활가정, 위탁가정 등에서 생활하는 보호대상 또는 취약계층 아동이 사회에 나갈 때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도록 지원하는 제도로, 아동이 일정 금액을 적립하면 국가가 그 2배를 매칭해 적립해준다. 적립한 돈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자립정착금과 함께 자립 초기에 큰 도움이 된다.

해지 경험이 있던 친구에게 물어봤다. 친구는 가까운 시청에서 신청하면 된다고 알려주면서 ‘해지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청에 도착했다. 그렇게 큰 관공서는 처음이었다. 민원실에서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는데 어쩐지 위축됐다. ‘제발, 큰 목소리로 어느 시설에서 자랐느냐고 물어보지 말았으면.’ 내가 관공서를 기피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내 차례가 왔고 용기 내서 말했다. “저 디딤씨앗통장 해지하러 왔는데요. 보증금 때문에 급해서….” 공무원분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통장이요? 통장이면 은행인데?” 한번 더 용기를 냈다. “여기 오면 된다고 해서 왔는데….” 적막이 흘렀다.

그분은 여기저기 연락해보더니 2층으로 가보라고 했다. 알려준 2층 사무실에 가서 다시 용무를 밝혔다. “디딤씨앗통장 해지하러 왔는데요.” 그게 뭐냐고, 되레 질문이 돌아왔다. 몇번이나 같은 설명을 반복했을까, 겨우 만나게 된 담당자에게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필요한 서류 목록을 메모해 시청을 나섰다. 보호종료확인서, 월세 계약서, 통장 사본, 주민등록등본 등 챙길 게 많았다. 친구의 경고(!)가 그제야 이해됐다. 뜻밖의 설명회(?)를 여러차례 치른데다 복잡한 서류들까지 마주하니 진이 빠졌다.

최근 아는 동생이 디딤씨앗통장 해지 방법을 물어와서, 최신 정보를 찾아볼 겸 포털에 ‘디딤씨앗통장 해지 방법’을 검색했다. ‘통장을 잃어버렸는데 해지가 되나요?’ ‘급하게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24살이 지나지 않아도 되나요?’ 등 방법을 묻는 말만 여러 페이지였다. 주변에 물어볼 이가 없거나, 자신의 환경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어려워 익명으로 빠른 답을 구하려 던진 질문들이리라.

실제로 디딤씨앗통장이 만기가 됐는데도 돈을 찾아가지 않는 보호종료청년이 4천명이 넘는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왜 그럴까?

첫째, 아동복지시설장이 계좌를 대신 개설하고 관리를 해주기 때문에 퇴소 이후에 통장의 존재를 잊거나 교육 부족으로 해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도 퇴소 전부터 자립전담요원 선생님이 여러번 알려주신 덕에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복잡한 행정절차다. 돈을 찾으려면 여러 서류를 제출하고 지자체 승인을 받은 뒤 은행을 찾아 인출을 요청해야 한다. 관공서와 은행에서 이런 복잡한 일처리를 해본 자립준비청년이 얼마나 있을까.

세번째는 자립준비청년을 둘러싼 인식이다. 만 28살이 넘었는데도 자립정착금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친구가 있다. 그는 일상에서 ‘고아’에 대한 편견을 마주한 경험이 많아 구청이나 시청에서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다고 했다. “자립에 도움을 주는 정책과 제도가 되레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친구의 말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립준비청년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렵고 막막하다. 그 ‘처음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방법은 없을까?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자립준비청년 지원 정책과 제도에 대한 더 적극적인 홍보와 대책을 세워줬으면, 더불어 지원제도 설계 때 자립준비청년 당사자들의 처지나 관점을 반영한 세심한 배려가 포함됐으면 한다. 당당하게 도움받고 건강하게 자립해 어엿한 공동체의 일원이 돼 사회에 기여하는 것, 아주 작은 배려에서 출발할 수 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