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발 위기] 美 은행 연쇄 파산, 금융 위기 오나 | ‘뱅크런’ 36시간 만의 붕괴 SVB…연준 금리 인상 보폭 줄일 듯
미국에서 3월 8일(이하 현지시각) 실버게이트뱅크, 10일 실리콘밸리뱅크(SVB), 12일 시그니처뱅크가 연쇄 파산하면서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 악몽이 소환되고 있다. 이들 은행은 모두 암호화폐 업체와 거래가 많은 편으로 SVB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자금줄 역할을 해왔던 대형 은행이다. SVB 파산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저축은행 워싱턴뮤추얼의 파산 이후 미국 역사상 두 번째 규모의 은행 파산이다.
SVB 파산으로 미국 스타트업과 중소 은행의 줄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13일과 14일 이틀간 세계 증시에서 금융 주식 시가총액이 600조원 이상 날아갔다.
실리콘밸리 한파 몰아치나
SVB는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 2090억달러(약 275조원), 총예금 1754억달러(약 231조원)로 미국 내 16위 은행이다.1983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설립된 SVB는 40여 년간 이 지역 신생 스타트업의 자금줄 역할을 해왔다. 외신 등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VC) 절반 이상이 SVB와 거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500개 이상의 VC와 미국 테크·헬스케어 벤처기업 44%가 SVB 고객이다.
이에 이번 사태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VC의 줄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SVB에서 예금을 인출하지 못한 일부 스타트업은 직원 급여도 주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美 고강도 금리 인상 여파
SVB 파산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급진적인 기준금리 인상이 원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SVB는 스타트업의 단기 예치금으로 미국 장기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에 투자했는데, 금리 인상으로 기업들의 예치금 인출이 잇따르자 유동성 압박이 커졌다. 금리 인상에 자금줄이 얼어붙으면서 자금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 스타트업들이 예치금을 빼기 시작한 것. SVB는 국채 등 보유 자산을 매각해 급한 불을 끄고자 했다. 그러나 금리 인상 속 채권 가격이 하락한 탓에 약 18억달러(약 2조3684억원) 규모의 손실을 봤다.
3월 9일 SVB가 이 사실을 공시한 직후 SVB 주가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이는 돈을 떼일까 우려한 고객들의 ‘뱅크런(bank run·대규모 예금 인출)’을 촉발했다. 이날 은행 거래 마감 시각까지 인출된 자금 규모는 420억달러(약 55조원)에 달했다. 결국 이튿날 캘리포니아주 금융 당국은 유동성 부족과 지급 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하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관재인으로 임명했다. SVB가 자금 위기에 마주한 지 불과 36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사태에 대해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 위기만큼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소식이 빠르게 확산했고, 이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사태가 악화했다”고 전했다.
중소 銀 연쇄 도산 우려…美 당국 진화 총력
이번 사태가 중소 은행 연쇄 파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SVB와 비슷한 사업 구조인 은행들에서 ‘뱅크런’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이런 우려는 이미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3월 12일 뉴욕주 금융서비스부(DFS)는 뉴욕주에 있는 시그니처뱅크를 인수하고 FDIC를 파산관재인으로 임명했다. 시그니처뱅크는 뉴욕·코네티컷·캘리포니아·네바다·노스캐롤라이나주 등에서 영업하는 상업 은행으로, 앞서 청산한 실버게이트뱅크와 함께 암호화폐 주요 거래 은행으로 알려져 있다.
미 금융 당국은 사태 진화에 전력을 쏟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도 금융 당국 수장들과 SVB 파산 관련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3월 12일 미 재무부와 연준, FDIC는 공동 성명을 내고 모든 예금주를 완전히 보호하는 방식의 사태 해법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미 연방예금보험은 은행이 파산한 경우 한 은행 계좌당 최대 25만달러(약 3억2895만원)까지 보호한다. 그러나 SVB의 경우 전체 예금의 거의 90%가 보험 한도를 초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우리는 은행 체계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강화해 미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결정적인 행동에 나선다”며 “고객이 맡긴 돈을 보험 대상 한도와 무관하게 전액 보증한다”고 밝혔다. SVB 고객이 맡긴 돈을 보험 대상 한도와 무관하게 전액 지급을 보증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SVB의 손실과 관련해 납세자가 부담하는 비용은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울러 유동성이 부족한 은행 지원을 위해 새로운 기금(BTFP·Bank Term Funding Program)을 조성하기로 했다.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등 담보를 내놓는 은행, 저축조합, 신용조합 등 금융기관에 1년간 자금을 대출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담보 가치는 시장가가 아닌 액면가로 평가한다. SVB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금리 인상에 따른 가격 하락을 고려한 조치로 해석된다. 테크 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둔 퍼스트리퍼블릭뱅크가 뱅크런 위기설에 휩싸이자 JP모건 등 11개 미국 대형 은행들이 300억달러(약 39조4700억원)를 투입하기로 한 배경에는 미 재무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국 영향 주시…금리 인상 속도 영향 미치나
SVB 파산은 글로벌 금융시장과 기업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전 세계 금융주다. 블룸버그·로이터 등에 따르면 사태 발생 직후인 3월 13~14일 이틀간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세계 금융주가지수와 MSCI 신흥국 금융주가지수에 포함된 주식 시가총액 4650억달러(약 609조원)가 증발했다.
SVB가 진출해 있는 국가들도 비상이다. SVB는 영국, 캐나다, 중국, 덴마크, 독일, 인도, 이스라엘, 스웨덴 등지에 진출해 영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각국 정부는 사태를 주시하면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일례로 SVB 영국 법인은 3월 13일 현지 은행 HSBC가 1파운드(약 1589원)에 인수했다. 이 거래는 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BOE)과 재무부가 주도했다. 제러미 헌트 영국 재무장관은 이와 관련해 “이 거래는 고객 예금이 보호되고 납세자 지원 없이 정상적으로 은행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영국 기술 기업 180여 개 사는 3월 11일 헌트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이번 사태와 관련한 정부 개입을 촉구했다.
국내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민연금은 SVB가 속한 ‘SVB 파이낸셜’ 주식을 지난해 12월 말 기준 10만795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기준으로 지분 가치는 2319만6000달러(약 305억원) 규모지만, 투자금 회수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태다.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이 지목된 만큼 향후 연준의 행보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연준은 3월 21∼22일 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 인상 폭을 발표할 예정이다.
3월 들어 시장에서는 연준이 또다시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할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연준이 긴축 속도를 늦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 기준금리 예측 모델인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는 3월 FOMC에서 미 기준금리가 현재 연 4.75%에서 5%로 0.25%포인트 상승할 것이란 전망이 이번 사태 이전 21.4%에서 14일 기준 79.7%까지 높아졌다. 반면 빅스텝 전망은 종전 78.5%에서 ‘제로(0)’로 떨어졌다. 투자 회사 더블라인캐피털의 제프리 건들락 최고경영자(CEO)는 CNBC에 “현시점에서 연준은 금리를 50bp(1bp=0.01%포인트)가 아닌 25bp 인상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고,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연준이 이번 FOMC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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