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화약고’ 중동에서 벌이는 미·중 파워게임] 사우디·이란, 7년 만 국교 정상화…美 제치고 中 ‘전쟁 중재자’로

전효진 기자 2023. 3. 2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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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무사드 빈 무함마드 알아이반(왼쪽) 사우디 국가안보보좌관과 알리 샴카니(오른쪽)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 의장, 왕이(가운데)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 회동을 갖고 사우디와 이란의 양국 관계 정상화에 공동으로 합의했다.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이슬람권 패권을 놓고 대립해온 수니파의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와 시아파의 맹주 이란이 외교를 단절한 지 약 7년 만에 중국의 중재로 관계 회복에 합의했다. 미국의 역할이었던 ‘국제 분쟁 해결’에 중국이 직접 뛰어들어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장을 내미는 모양새다. 외신에선 중국이 미국을 대신해 중동 정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3월 10일(이하 현지시각)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란과 사우디는 중국 베이징에서 공동성명을 내고 양국의 외교 관계를 복원하고 향후 2개월 안에 상대국에 대사관을 다시 열기로 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중국 외교부도 11일 공식 입장문을 통해 “중국, 사우디, 이란 3국이 외교 방식으로 (사우디와 이란의) 분쟁을 해결하기로 합의했고, 중국은 사우디와 이란의 선린우호 관계 발전을 지지하는 것에 관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적극적인 구상에 호응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협상은 3월 6일부터 10일까지 이란의 알리 샴카니 최고국가안보회의 의장과 사우디의 무사드 빈 무함마드 알아이반 국가안보보좌관, 중국의 왕이 중앙정치국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됐다. 중국이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확정 짓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가 열리는 시점에 진행된 것이다. 왕이 위원은 이 자리에서 미국과 대립할 때마다 주장해온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을 반복하듯 “중동은 현지인의 것이며 이 지역의 운명은 역내 국가 국민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양국 성명과 함께 공개한 사진에선 사우디와 이란 협상 대표가 악수하고 있고, 그 가운데 왕이 위원이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수전 말로니 브루킹스연구소 외교정책 담당 부국장은 워싱턴포스트(WP)에 “중동 지역에서의 중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진을 공개하는 등 홍보 면에서 중국에 큰 승리를 안겨준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사우디가 바이든 행정부의 뺨을 한 번 더 때린 셈”이라고 분석했다.

3월 10일 중국 제14기 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전체회의가 열린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손뼉을 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중국 외교의 승리’

사우디와 이란은 2016년 사우디가 자국 내에 있던 시아파 지도자들의 사형을 집행하자 이란 강경 보수 세력이 이란 주재 사우디 공관 두 곳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예멘에서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과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이 2014년부터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2019년 사우디 정유 시설이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받아 사우디 원유 생산의 절반가량이 타격을 입었을 때,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후 양국은 2021년부터 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시작해 지난해까지 다섯 차례 회담을 했다. 국가 개조 프로젝트 ‘비전 2030’을 추진하기 위해 국내 정세 안정이 필요한 사우디와 경제난에서 벗어나려는 이란의 속내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지만, 중국의 중재로 합의에 이르게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CNN은 워싱턴 싱크탱크 아랍걸프국가연구소의 후세인 이비시 박사 인터뷰를 통해 “베이징에서 합의됐다는 점은 중국이 걸프 지역에서 외교적·전략적 플레이어로서 부상하는 데 무척 큰 의미가 있다”며 “미국에는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닐 것”이라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고조되는 미국과 경쟁 속에서 글로벌 정치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시진핑 주석의 새로운 야망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의 외교적 영향력이 경제적 위상에 맞게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은 사우디 원유의 최대 수입국이며, 미국의 경제 제재로 판로가 막힌 이란산 원유를 대량 수입하고 있는데 이들과 최근 두터운 관계를 맺어온 중국이 미국을 대신해 중재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앞서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지난 2월 베이징을 방문, 시진핑 주석과 함께 대(對)이란 경제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비판받으면서 중동에서 더는 지배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안전 보장에 대한 오랜 동맹국들의 의구심이 커지고 있지만, 미국과 달리 중국은 인권에 대한 설교 없이 모든 당사자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으로부터 인권 침해국이란 공격을 받은 사우디가 미국에 대한 순종 외교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과시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광폭 행보’ 中, 아랍 산유국 정상회의까지 추진

사우디와 이란 간 국교 정상화를 중재한 데 자신감을 얻은 중국은 아랍 산유국으로 구성된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과 이란 간 다자 정상회의도 추진 중이다. WSJ는 12일 소식통을 인용해 시 주석이 지난해 12월 사우디 리야드를 방문해 아랍 지도자들을 만났을 때 GCC와 이란 간 다자 정상회의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GCC는 사우디와 함께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쿠웨이트, 오만, 바레인 등 걸프 지역 6개 아랍 국가가 1981년 만든 지역 협력체다. GCC와 이란은 올해 안에 베이징에서 만나 다자 정상회의를 할 계획이다. 이들은 중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듯 사전에 영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문서도 아랍어, 페르시아어, 중국어로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겉으로 이란과 사우디의 관계 회복을 환영한다면서도 중국의 역할 확대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우리는 이 지역에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지지한다”면서도 “(합의가 지속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이란 정부는 자기 말을 지키는 정권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란이 사우디와 협상 테이블에 나오도록 한 것은 대내외적 압력 때문이지, 대화하고 협상하라는 중국 초청 때문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중동 아랍 국가는 환영, 이스라엘은 혼란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 정상화 합의에 중동의 아랍 국가들은 일제히 환영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외교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추진한 ‘반(反)이란’ 연합 전선이 사실상 와해된 것 아니냐며 외교적 참사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1일 UAE와 이라크, 오만 등 중동 국가들은 대체로 이번 합의가 지역 안정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는 입장을 내놨다. 압둘라 빈 자예드 알 나흐얀 UAE 외교장관은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라고 평가했고, 바드르 알부사이디 오만 외무장관은 “모두를 위한 ‘윈윈’으로 지역과 세계 안보에 도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라크도 외교부 성명을 통해 “새로운 페이지가 열렸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과 대(對)이란 전선을 구축하려던 이스라엘에서는 자국 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야권 지도자인 야이르 라피드 전 총리는 트위터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총체적이고 위험한 외교 정책 실패”라며 “이는 이란에 맞서 우리가 구축하기 시작한 지역 방어벽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은 2020년 9월 미국의 중재하에 UAE와 바레인·모로코·수단 등 이슬람 4개국과 외교 관계 완전 정상화를 골자로 한 ‘아브라함 협정’을 맺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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