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웹툰을 회사가 맘대로?···공정위 시정 권고에도 ‘지재권 양도’ 계속

윤기은 기자 2023. 3. 2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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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작가 B씨가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2019년 스튜디오 제작사로부터 제안 받은 계약서를 보이고 있다. 윤기은 기자

9년차 웹툰작가 A씨는 데뷔 전 한 제작사로부터 계약서를 받았다. 계약서에는 “‘작가’는 ‘OO’(제작사)의 검수를 통과하여 최종 완료된 결과물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저작재산권(2차적 저작물 작성권 포함) 등 지식재산권 및 소유권을 ‘OO’에게 양도하며, 결과물에 대한 저작재산권(2차적 저작물 작성권 포함)등 지식재산권과 소유권 등의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A씨는 계약서가 불공정하다고 판단해 계약하지 않았다.

웹툰 지식재산권에 관한 제작사의 횡포가 문제가 되자 공정거래위원회는 2018년 “제작사가 2차 저작물 권리까지 모두 가져가는 것은 ‘불공정 계약’”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21개 웹툰 제작사에 약관을 시정하라고 권고했다. “저작자는 연재 계약을 체결한 사업자 이외에도 다수의 상대방과 2차적 저작물 거래 조건을 협의해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할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이후 웹툰 업계의 현실은 개선됐을까.

“‘작가’가 제공한 결과물의 모든 저작권(복제권, 공영권, 송신권, 전시권, 배포권, 대여권, 2차적저작물 작성권 등)은 각 화의 검수기간 합격일을 기준으로 ‘OO’(제작사)에 귀속된다.”

30대 웹툰 작가 B씨는 2020년 초 제작사로부터 처음으로 연재 제의를 받았는데, 제작사가 건넨 계약서에 이런 조항이 있었다. B씨는 계약을 맺었다가 업계 상황을 어느 정도 알게 된 후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에 이의를 제기했다. B씨는 2022년 4월 회사와 수차례 협의한 끝에 저작물 사용권 25%를 갖는 조건으로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B씨는 27일 통화에서 “몇몇 제작사들은 계약서에 ‘지식재산권을 회사로 양도하라’는 내용을 넣는다”며 “계약이 성사되면 콘텐츠가 작가 의도와 상관없이 쓰여도 작가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공정위의 판단과 권고는 현실에서 무시되기 일쑤라는 것이다.

한 웹툰 스튜디오 제작사가 웹툰작가 B씨에게 제안한 계약서. 콘텐츠 지식재산권과 소유권을 제작사에 양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B씨 제공

웹툰 작가들이 강요당하는 ‘불공정’은 저작권 양도에 그치지 않는다. 제작사는 ‘판매관리비’(판관비)를 작가에게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다. 판관비는 제작사가 콘텐츠를 판매·유통할 때 지출하는 비용이다. B씨는 “기획과 저작 권리가 회사에 귀속된 상황인 데다, 제작사와 작가가 ‘사업 파트너’가 아니라 ‘외부 용역작가’로 계약한 상황에서 작가가 판관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은 납득이 어렵다”고 했다.

신인 작가는 특히 불공정 계약에 취약하다. 법 지식이 부족하고 업계 정보에 어두워 해당 계약이 불공정한지 모르거나 데뷔가 간절해 ‘울며 겨자먹기’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A씨는 “계약 조건을 기밀로 부치라는 제작사의 강요, 제작 환경의 복잡함, 계약 형태 다양화로 인해 작가들의 ‘정보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웹툰 작가와 제작사의 불공정 계약 문제는 1990년대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 이우영 작가가 작품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호소하며 최근 극단적 선택을 해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행설앤 대표 장모씨와 이 작가 측은 2007~2010년 ‘(장씨에게 귀속되는 권한은) 모든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 및 그에 파생된 모든 2차적 사업권을 포괄한다’는 조항을 담은 계약을 맺었다. 이후 이 작가 측이 만화 속 캐릭터를 개인 창작·출판 활동에 활용하자 형설앤 측은 법적 대응에 나섰다.

이우영작가사건대책위원회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세대를 막론한 사랑을 받은 ‘검정고무신’을 그린 작가가 작품 저작권을 강탈당하고 그 괴로움에 못 이겨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 만화·웹툰계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며 “(형설앤 측이) 캐릭터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이 작가의 동생이자 ‘검정고무신’ 공동 작가인 이우진 작가는 “혼자서 싸우다 아주 멀리 떠난 형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조금 더 관심 가져주고 귀 기울여달라”고 했다. 그는 “(캐릭터 업체 형설앤과 계약을 맺은) 2007년의 인연은 악연이 돼 형의 영혼까지 갉아먹었다. 어린 시절 만화를 사랑했고, 만화 이야기로 밤새우던 형의 목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게 됐다”며 울먹였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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