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우리나라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염창현 기자 2023. 3. 2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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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쌀 소비량 줄어들며 과잉 생산물량 처리 두고 여야 간 의견 대립 심화돼
건설적인 결론 도출 통해 국민 우려 빨리 종식해야

우리나라 지자체 가운데는 생활사박물관 형태의 전시공간을 운영하는 곳이 꽤 된다. 오래 전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물품들을 구경할 수 있는 데다 힘든 시기를 지나온 세대들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어 호응이 꽤 좋다고 한다. 옛날 사진관, 이발소, 아궁이가 있는 부엌 등이 많은 사람이 찾는 장소다. 지금과 달리 한 학급에 60~70명이 공부했던 과거 교실도 인기가 높다. 시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곳에는 대개 난로 위에 놓인 양은 도시락의 모습을 재현해 놓는다.

요즘은 급식체계가 잘 갖춰져 있어 집에서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하지만 수십 년 전에는 등교 때 필수품이었다. 이 때문에 보통 서너 명의 자녀를 한꺼번에 학교에 보냈던 당시 어머니들은 아침이면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도시락과 관련해 지금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또 있다. ‘혼·분식 장려운동’에 따른 도시락 검사다. 이 정책은 쌀이 부족했던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에 절정을 이뤘다.

그즈음 사회에서는 쌀보다 보리와 잡곡, 밀가루가 영양학적으로 더 우수하다는 홍보가 진행됐다. 하루 세끼 쌀밥만 먹는 습관에서 해방돼야 하며 점심을 국수로 먹자는 내용의 광고가 언론에 실리기도 했다. 또 학교에서는 혼·분식을 하지 않으면 애국자가 아니라는 식의 교육이 이행됐다. ‘…꿀보다도 더 맛 좋은 꽁당보리밥.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라는 동요가 유행한 것도 이 당시다.

선생님은 점심시간 전에 학생들에게 도시락 뚜껑을 열게 한 뒤 보리쌀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를 살폈다. 지적당한 학생은 창피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부에서는 처벌을 하거나 학부모에게 각서를 쓰게 하는 일까지 발생해 사회 문제로 확산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쌀밥 위에 보리를 살짝 덮었다가 이를 이상하게 여긴 교사가 도시락을 뒤엎는 바람에 적발되는 사례도 종종 일어났다.

이 같은 정책은 1970년 중반 이후 사라진다. 다수확 품종이 성공적으로 개발되면서 쌀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통일벼다. 1972년부터 보급된 통일벼는 다른 품종보다 생산성이 30%가량 높았으며 병충해에도 아주 강했다. 상대적으로 맛이 없고 냉해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식량 자급을 이루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정부는 많은 다수확 품종 개발에 성공했으며 이는 ‘쌀이 모자라 억지로 혼·분식을 하도록 했던 시기’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시대가 바뀌면 정책이 바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정부는 이제 넘쳐나는 쌀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집중해야 할 상황과 마주쳤다. 쌀 생산량은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소비량 급감으로 공급 과잉현상이 빚어지고 있어서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은 1인당 56.7㎏의 쌀을 먹었다. 30년 전인 1991년(116.3㎏)에 비해 절반 이상 떨어진 수치다. 건강상 이유, 서구식 음식문화 유입 등에 따른 식생활 변화가 원인으로 풀이된다.

이에 정부는 최근 ‘쌀 적정 생산대책 추진계획’을 세웠다. 벼 재배 면적 축소, 논콩·가루쌀로 대체 재배, 타작물로 전환 때 전략작물직불금 지급 등이 주요 내용이다. 또 일부 다수확 우량종 보급을 중단하는 대신 밥맛이 좋은 품종을 개발한다는 전략도 세웠다. 이는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꾸준히 추진해왔던 ‘쌀 생산량 증가 정책’이 ‘품질 우선’으로 바뀌게 됨을 뜻하는 것이어서 시선을 끈다. 정부는 계획이 제대로 이행되면 과잉 생산으로 폭락했던 쌀값이 안정돼 농가소득이 증가하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

반면 현재 불거진 갈등이 완전히 봉합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편에서는 정부의 다수확 우량종 보급 중단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또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핵심은 초과 생산된 쌀의 의무적 ‘시장격리’(쌀값 하락을 막기 위해 정부가 물량을 구매하는 제도)다. 정부와 여당은 재정 부담 등을 이유로 이 법안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는 이유다.


어떤 정책을 수립할 때 여야 간 견해 차이가 생기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바다. 다들 국익을 위한 것이니 만큼 무작정 나무랄 일은 못 된다. 그러나 하루빨리 통일된 의견이 나와야 한다는 당위성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쌀과 우리 민족과의 관계, 식량 안보 등을 고려하면 너 좋고 나 좋다는 식으로 넘어갈 사안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예전의 보릿고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이유가 뭐든 ‘쌀을 두고 티격태격 싸우는 행위’가 용납될 수 없을 터다. 우리나라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고 하지 않던가.

염창현 세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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