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반갑다, 저어새야

경기일보 2023. 3. 2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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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2008년 겨울 일본 오키나와 북부 얀바루숲을 거닐 때였다. 우거진 아열대숲 가운데서 우연히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고 통성명을 나눴다. 한국에서 왔다니 반가워하면서 ‘Spoonbill’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스푼빌이 무엇인지 되물으니 두 손을 모아 입 앞에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열심히 설명했다. 그제야 숟가락 모양의 부리를 가진 저어새(Black-faced spoonbill)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신문기자인데 겨우내 오키나와에 머무는 저어새를 취재하고 있다고 했다. 차로 돌아와 자신이 찍었다는 저어새 사진을 보여주는데 오른 다리엔 K69라고 적힌 붉은 가락지가 선명했다. 한국에서(Korea) 69번째로 가락지를 달아 보낸 저어새라는 의미다. 바다 건너 타국에서 옛친구를 만난 듯 반가움이 컸다. 훗날 수소문해 보니 2007년 7월 15일 강화도 남단 각시바위에서 가락지를 부착한 녀석이란다.

저어새는 전 세계에서 동아시아에만 분포하며 여름에 한반도에서 번식하고 비교적 온난한 대만, 규슈, 중국 남부에서 월동하는 철새다. 멸종위기야생생물 I급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으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레드리스트에서 멸종위기종(EN)으로 분류돼 있다. 1988년에는 관찰된 저어새가 288마리에 불과해 멸종 직전까지 내몰렸다. 접경지대 일대 갯벌과 유도, 비도, 석도 같은 무인도가 저어새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분단의 비극에 의해 남겨진 터전에서 저어새는 겨우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2000년대 들어 저어새를 살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됐다. 저어새네트워크, 인천저어새공존협의체 등 시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모임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저어새 모니터링과 주요 번식지 보전 활동이 펼쳐졌다. 최근 한국가스공사는 ESG 경영의 일환으로 너구리 피해를 입은 남동유수지 저어새 번식지 둘레 울타리 설치를 지원하기도 했다. 관계기관 및 시민들의 보전 노력에 힘입어 다행히 저어새 번식지는 21곳으로 늘어났으며 개체수도 2014년 2천726마리, 2022년 6천162마리로 회복 추세다.

하지만 아직 긴장의 끈을 놓기엔 이르다. 저어새 생존에 가장 큰 위협 요인은 갯벌 매립과 개발로 인한 서식지 감소다. 전 세계 저어새 개체군의 80% 이상이 인천, 경기만에서 태어난다. 저어새는 감각이 발달한 부리로 얕은 물을 휘저어 물고기나 새우 같은 먹이를 구해야 하는데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 갯벌이 최적의 먹이터다. 송도, 고잔 갯벌이 매립되면서 남동유수지 저어새들의 출퇴근 거리는 늘어나고 있다. 또 무심코 버린 낚싯줄과 바늘이 부리나 몸에 걸려 부상을 입거나 죽는 경우도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저어새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한 핵심은 갯벌 보전과 우리들의 지속적인 관심에 있다.

강화 출신 K69는 2008년 이후 여름엔 우리나라에서 번식하고 겨울엔 일본, 대만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러다 2019년 1월 대만에서의 관찰기록을 마지막으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젠 K69의 빈자리를 자식들과 동료 저어새들이 채우고 있다. 올해도 따사로운 봄볕과 함께 저어새들이 2천㎞ 이상을 날아 기어이 고향에 돌아왔다. 번식지마다 둥지 재료를 찾고 모으며 알을 낳느라 정신이 없다. 이제 몇 주 있으면 둥지마다 인천·경기에 본적을 둔 어여쁜 솜뭉치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아비 어미 저어새들은 새끼 먹이느라 더욱 분주하게 부리를 휘저을 것이다. 인천·경기가 품고 길러 멸종 직전에서 되살려낸 우리의 자랑, 저어새를 후손들도 볼 수 있길 바란다. 저어새 보호에 힘을 쏟은 시민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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