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한의 토포필리아] 구름을 찾아 나선 날

한겨레 2023. 3. 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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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의 토포필리아]

옛 유원지의 추억이 신도시 풍경 한가운데 포개진다. 광교호수공원. 사진 배정한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일까. 주말 신문의 신간 소개 기사 읽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드물다. 지난 토요일엔 ‘구름감상협회’ 설립자 개빈 프레터피니의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 신기하고 매혹적인 구름의 세계>에 시선이 꽂혔다. 당장 서점에 가려 문을 열었는데, 정말 놀라운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맙소사, 출판사 증정본이 배달돼 있다니.

“‘파란하늘주의’에 맞서 구름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알리는” 목적으로 쓴 구름 책. “두둥실 떠가는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깔린 햇살 좋은 나른한 오후가 구름 한점 없는 밋밋하고 단조로운 하늘보다는 훨씬 나은 법이다.” 솜털처럼 아늑한 적운(뭉게구름)을 다룬 첫꼭지를 순식간에 읽고 무서운 구름의 왕, 적란운 이야기로 넘어가다 깨달았다. 당장 나가야 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구름의 덧없는 아름다움이 나를 초대하고 있지 않은가.

솜털처럼 아늑한 뭉게구름이 산책자를 환대한다. 광교호수공원. 사진 배정한

언제 가도 경쾌하고 활기찬 광교호수공원을 택했다. 여느 신도시와 달리 광교에 들어서면 생동감이 넘친다. 아직 세월의 때가 쌓이지 않아 조금은 생경한 풍경, 하지만 백지가 아니라 양피지에 쓴 글처럼 두터운 층과 켜를 지닌 도시로 느껴진다. 광교산의 형세가 도시로 이어지고 원천과 신대, 두 저수지를 품에 안은 형상 때문이다. 이 도시의 주연은 옛 저수지의 형태와 기억을 담아 디자인한 광교호수공원이다.

놀거리와 갈 곳이 많지 않던 시절, 원천저수지 일대는 꽤 이름난 유원지였다. 인천을 대표하는 유원지가 송도와 월미도였다면, 수원엔 원천이 있었다. 헙수룩한 건물에 색동 조명을 단 카페들이 나들이 나온 연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호수랜드라는 어색한 이름의 간이 테마파크에선 긴 줄 서지 않아도 ‘바이킹’의 스릴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시절 원천 최고의 명물은 오리배였다. 자전거 타듯 페달만 밟으면 누구나 거침없이 물살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남루한 숙박시설과 식당들은 대학생 엠티(MT)의 명소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신입생들의 어설픈 노래가 칠흑 같은 호수의 밤하늘을 갈랐다. 이제 세련된 신도시 공원으로 변신했지만, 물가를 거니는 이들의 풍요로운 웃음은 옛 유원지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광교호수공원의 가장 큰 매력은 마음껏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높고 넓은 하늘이 머리 위에 가득 펼쳐져 있어 고층 아파트조차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너무 멀리 길을 나서진 않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을 풀고 평온한 산책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걷기는 신체를 세상으로 여는 행위다. 몸의 모든 감각으로 세계와 만나는 과정이다. 두팔을 마음껏 흔들며 호숫가를 걷다 보면 풍경 경험의 주도권이 나에게 온다. 속도감을 우아하게 망각하며 걷기에 몰입하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길이 트인다. 오래전 유원지의 추억이 신도시 한가운데 포개진다.

광교호수공원의 원천호숫가에서 가장 이채로운 곳은 ‘도회적 제방’이라는 이름의 산책로다. 옛 저수지 제방에서 벌어진 휴식과 행락의 기억을 재해석해 디자인한 이 동선은 서로 다른 높이의 제방길 세 개가 엮이고 엇갈리면서 경관 체험을 다채롭게 해준다. 제일 낮은 제방을 걸을 땐 수면이 발 바로 밑에 있어 물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 든다. 제일 높은 제방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면 같은 수면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 날렵한 난간을 따라 덱 위를 걷다 보면 갑자기 습지가 등장하고 제멋대로 자란 물풀이 눈앞에 놓인다. 거친 갈대 군락이 초고층 건물들의 차가운 질감과 대조를 이룬다. 이 의외의 풍경을 응시하면 짧은 순간이나마 지도 바깥으로 탈주할 수 있다.

다양하고 풍성한 공원 의자가 걷는 사람들을 반긴다. 광교호수공원. 사진 배정한

구름 책을 읽다 급기야 구름을 찾아 나선 토요일 오후, 원천호수보다 덜 붐비는 신대호수로 방향을 잡았다. 걷는 사람들을 반기는 의자가 즐비하다. 고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맡길 수 있는 공원 의자는 오아시스처럼 경이로운 선물이다. 전형적인 벤치뿐 아니라 1인용 소파처럼 발 뻗고 기댈 수 있는 의자, 이용자가 자유롭게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의자, 모듈을 조합해 즉석에서 디자인할 수 있는 의자, 평상처럼 넓어 야외 거실 역할을 하는 의자, 그늘막이 펴지는 테이블 딸린 의자에 이르기까지 신대호숫가는 산책자를 환대하는 의자로 풍성하다.

<사람, 장소, 환대>의 인류학자 김현경이 말하듯,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공원 의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몸을 눕혔다. 운 좋게도 미세먼지 적은 날, 하얀색 브로콜리 더미 모양으로 솟아오른 뭉게구름을 보며 마음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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