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 안전판 마련한 건국대통령" 이승만 탄생 148주년 기념한 여권

한기호 2023. 3. 2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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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국힘 前비대위원장, 李 초대대통령 탄생 148주년 계기 메시지
"우남은 혁명아, 공화국 가는 길 열어" 독립운동·제헌의회·한미방위조약 비화 전해
이화장서 李 탄생 기념식…박민식 보훈처장, 보수인사-4·19세대 원로들 한자리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진석 의원.<정진석 국회의원 페이스북 사진>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황교안 이승만대통령 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여권에서 독립운동가 겸 초대대통령인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1875~1965년)의 탄생 148주년을 기념하면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라며 "전후(戰後) 70년의 평화와 번영을 선물한 이"라고 기렸다. 업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정체성 확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강조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26일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 70년,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은 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동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 가능했다. 이런 거대한 판을 깔아준 이는 우리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다. 오늘 그 분의 148번째 생신"이라고 밝히면서 우남의 생애와 족적을 소개했다.

그는 "우남은 '혁명아'였다.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을 스스로 철회했다. 그는 1899년 고종 폐위 사건에 연루돼 한성감옥에 투옥됐다가 1904년 특사로 풀려났다. 쇠잔해가는 조선을 소생시키기 위해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통해 안간힘을 썼다. 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강조했다.

또 "(독립운동가로서) 우남은 '기린아'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한성정부·임시정부 등에서 하나같이 우남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며 "1948년 8월15일 이승만은 73세의 나이였지만,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으로서 우뚝 섰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제헌국회가 문을 연 그날 이승만은 의장석에 올라 회의를 진행했다. 그의 첫 마디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면서, 제헌의회 의장이던 이 초대대통령이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기도를 청한 일화를 꺼냈다.

이에 대해 정교분리 근대국가로서 출발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면서도 "'국권을 잃고 천신만고 끝에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 천지신명의 가호 덕'이라는 우남의 진심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진석 전 비대위원장은 또 "우남은 대한민국 수립 2년만에 끔찍한 전쟁을 맞았다.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손을 잡고, 스탈린이 승인한 작전계획대로 (자칭) '민족해방 전쟁'을 시작했다. 3년간의 전쟁은 동서 냉전체제를 구축한 처절하고 끔찍한 살육전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군은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속에서 나라를 지켰지만 (나라가) 취약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1950년 10월 북진해서 압록강에 도달했던 2군단 자체가 중공군에 의해 사라졌고, 1951년 5월 중공군의 공세에 국군 3군단이 산사태가 나듯 궤멸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2차 세계대전을 치른 미군 지휘관들의 눈에 한국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군대였다. 미군이 보유한 탱크와 포를 빌려 주지 않았다"며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5월3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미상호안보조약을 체결해 달라'는 친서를 보냈다"고 또 다른 결단 사례를 소개했다.

정 전 비대위원장은 "(친서 내용은) '한국전쟁이 끝나더라도 미국이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였다"며 "(휴전 회담 중이던) 미국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극약처방'을 했다. 1953년 6월18일 거제도와 제주도·논산 등에 수용된 공산군 포로 중 자유의 품에 남겠다는 반공포로 2만700명을 석방시켰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1953년 10월1일 체결된 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며, 양국 중 어느 한쪽이라도 다른 국가로부터 무력 공격을 당할 경우 '자동 개입'하는 근거가 됐다고 소개했다. 또 "(북한) 김정은의 '막가파식 공갈'이 잘 먹혀들지 않는 이유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한 굳건한 한미동맹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이 초대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 공식 참석했다. 기념사업회장인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 전(前) 기념사업회장인 박진 외교부 장관,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까지 정부·여당 측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4·19 세대로 불리는 정계 원로들과 독립유공자 유족 등까지 150여명이 자리했다.

박민식 처장은 기념사에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방향 설정, 유엔군 참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업적을 들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 대통령이 만든 토대 위에 이뤄졌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며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야말로 바로 서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한 발전상을 대조해 "자유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공칠과삼이 아니라 '공팔과이'로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역사의 패륜아로 낙인찍혀 오랜 시간 음지에서 신음했다"며 "진영을 떠나 이제는 후손들이 솔직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할 때"라고 밝혔다.

1한기호기자 hkh89@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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