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안중근 의사의 유묵에 담긴 뜻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3. 3. 26. 17:1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형 앞두고도 일본인에게
글 써주는 넉넉함 보인 안 의사
그모습서 한일관계 해법 본다

정확히 113년 전 1910년 3월 26일 아침, 뤼순감옥에서 사형집행장으로 가기 직전 안중근 의사는 호송관인 지바 도시치 상등병에게 "지필묵을 좀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전 감옥에서 법정으로 호송될 때 귓속말로 "휘호 한 점 받고 싶다"던 호송관의 부탁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지바 상등병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 행서체 여덟 글자를 써주었다.

사형을 앞두고 있었지만 획에 일말의 불안감이나 주저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글씨에 활력이 넘쳤다. 안 의사의 마지막 유묵을 가보로 간직해오던 지바의 후손들은 1980년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했고 이 유묵은 보물로 지정됐다.

1910년 2월 14일 안 의사에게 사형이 언도된 뒤 그에게 글씨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일본인이었다. 안 의사를 취조한 야스오카 세이시로 감찰관은 물론, 감옥의 간수 시타라 마사오, 사형수의 교화를 담당했던 승려까지 모두 안 의사에게 글씨를 부탁해서 받아갔다. 비록 사형수였지만 일본인들이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안 의사를 존경하고 흠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26일 효창공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 추모식에서 '동양평화만세만만세(東洋平和萬歲萬萬歲)'라고 쓴 안 의사의 새 유묵 1점을 추가 공개했다. 외부에 공개된 안 의사의 58번째 유묵이다.

안 의사에게 유묵을 부탁해 보관했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안 의사의 말씀을 기억하게 됐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서툰 목수는 아름드리 좋은 목재를 다룰 수 없다(庸工難用 連抱奇材)' '홀로 자만하는 것보다 더한 외톨이는 없다(孤莫孤於自恃)'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이 단단하고 의사(義士)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상은 구름같이 드높다(丈夫雖死 心如鐵 義士臨危 氣似雲)' 같은 말씀이 모두 유묵을 통해 전해진다. 안 의사가 남긴 유묵은 단순한 붓글씨가 아니라 그의 인생관과 학식, 삶의 태도가 담긴 그의 짧은 자서전인 셈이다.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에서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안 의사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써준 유묵에는 원래 '○○○에게 대한국인 안중근 삼가 드립니다'라는 의미의 '贈○○○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데 이 글자들을 가리고 사진을 찍거나 보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안 의사 유묵에서 이 부분을 가리기 위해 종이가 덧대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가 '서울리뷰오브북스' 2023년 봄호에 쓴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철도'에서 재인용).

아마 안 의사의 유묵들을 보물로 지정할 당시 불굴의 항일 투사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들에게 글씨를 써주고 거기에 '삼가 드립니다'는 글을 남겼다는 사실을 굴욕적으로 느끼거나 불편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작 안 의사는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준 사람들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글을 써주었는데 우리 안의 강퍅한 반일주의가 이런 사실 자체를 숨기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이 역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식민지 콤플렉스일 뿐이다.

일제 재판관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동양 평화를 위한 정당한 의거라고 주장하던 당당함, 몇 달을 함께 보낸 일본인들에게 '謹拜(근배·삼가 드립니다)'라며 글을 써주는 넉넉함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안 의사의 모습이다. 그 두 가지 면모에 한일관계의 해법이 담겨 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장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지바 호송관에게 "동양에 평화가 찾아오고 한일 간 우호가 회복되는 날 다시 태어나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김기철 콘텐츠기획부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