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은 ‘사람 대접하기’가 그리 어려운가 [아침햇발]

정남구 2023. 3. 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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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일제 강제동원]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지난 3월1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참고인으로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정남구 | 논설위원

2002년 8월,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 이금주 할머니 댁에서 김혜옥 할머니를 만났다. 그날 들은 말이 <한겨레21>에 ‘나는 걸었다, 그들은 울었다’(421호)라는 제목의 기사로 남아 있다. “할머니는 가슴에 새겨둔 한을 토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열세살 때였어. 어느 날 교장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지. 부모님은 반대하셨지만,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계셨던데다 내가 우기니까 어쩌지 못하셨어. 부모님은 나를 전송하면서 자꾸 우셨지만 그땐 그 이유를 몰랐지.”

열세살 소녀는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소속 공장에서 비행기 부품에 페인트칠을 하며 1년여를 보냈다. 늘 배가 고팠다. 한토진(반도인)이란 멸시를 받는 것도 서러웠다. 가슴 부풀게 했던 여학교는 고사하고 월급 한푼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후유증으로 결핵을 앓았다. 근로정신대를 ‘일본군 위안부’로 보는 오해 때문에 할머니가 겪은 숱한 고통을 나는 차마 기사에 다 담지 못했다. 그날 나는 가슴 한구석에 차오르는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57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생각이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팔 살아 있는 현재를 나는 왜 아득한 과거라고 생각했던가”라고 나는 반성했다.

강제동원 피해 배상 소송은 19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시작됐다. 소송에 참여한 김혜옥 할머니는 끝내 명예회복을 못 하고 2009년 돌아가셨다. 이금주 할머니는 2021년 돌아가셨다. 그분들은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손해배상 소송에 매달렸던가? 나는 그날 이렇게 들었다. “우리도 사람이잖아! 그들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받고, 사과받고 싶어.”

정부가 강제동원 기업에 배상을 명령한 대법원 판결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고,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제3자’에 의한 배상 방침을 최근 밝혔다. 이는 피해자들이 단지 돈 때문에 싸워왔다고 못박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혜옥 할머니와 같은 공장에서 일한 양금덕 할머니는 “동냥해서 주는 것 같은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사람을 사람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 뜻을 이해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말리고 우려하는 이가 많았음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결정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절망적이다. 돌이켜 보면 윤 대통령의 언행에선 인간에게서 존엄성을 제거하고, 그저 ‘시장 가격에 쓸 수 있는 노동력’으로 보는 관점이 진작부터 묻어났다.

2021년 7월 정치 참여를 선언한 그는 <매일경제>와 한 인터뷰에서 스타트업 청년들의 바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 상황에 따라 간혹 그런 선택을 선호할 사람이 있을지라도, 제도적으로 그걸 바라는 노동자는 없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타이밍(1970~80년대에 많이 팔린 졸음예방약)을 먹여가며 일을 시키던 ‘꼰대’ 고용주들의 향수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라고 하기에는 노동시간이 너무 길고, 장시간 무리한 노동 속에 산업재해가 말도 못하게 많이 일어나는 나라다. ‘주 52시간 상한’도 아직 자리를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주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법을 고치겠다고 했다. 반발이 거세자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말을 바꾸고, 여론의 화살을 고용노동부로 돌리려 하고 있다. 2020년 7월 타이밍 정이 27년 만에 재출시됐는데, 대통령은 그 약을 팔아주고 싶은 것일까.

분위기가 뜨면 취하는 사람도 나온다.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이 최근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허용하는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전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장했던 것인데, 윤 대통령 앞에서 탬버린을 친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 법이 실현되면 싱가포르와 같이 월 100만원 수준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사용이 가능해진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하고 있다고 ‘차별받는 신분의 창출’이 정당화될 순 없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려 한다. 공동발의자로 서명했던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이정문 의원은 철회했다. ‘실무상 혼선’이었다는데, 아닌 것 같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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