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도우미·아이셋 군면제’ 정책 유감…또 도구화 된 여성 [정지혜의 빨간약]

정지혜 입력 2023. 3. 2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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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가사도우미를 고용해서 집안일이나 돌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좀 유별나게 보인달까요. 가정을 이뤘다면 기본적으로 그 안에서 가사·돌봄이 가능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아요. 엄마, 아빠가 성 역할 구분 없이 육아휴직과 가사노동을 하는 구조가 그렇게 정착한 거죠. 공공 보육 서비스는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개념이고요.“

합계출산율로 대한민국보다 약 두 배 높은 국가 스웨덴에 출장을 갔을 때, 현지 취재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북유럽 사회는 ‘개인주의적’이라고만 여겼던 편견이 깨짐과 동시에, 선진국이면서도 출생률 높은 사회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듣자마자 ‘이곳이야말로 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에 진심인 사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도우미를 써야만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는 상태를 부자연스럽다고 여기고, 그 지경이 되지 않도록 성평등 제도와 인식을 정비한 점에 새삼 놀랐다. 남과 비교하거나 과시하는 것을 꺼리는 특유의 문화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일터에서 무리하게 경쟁하지 않고 가정 생활과 조화를 이루는 것(Lagom)을 이상적이라 보는 분위기 말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 남성의 육아·돌봄 참여는 여성의 그것만큼 당연한 기본값이 됐다. 성평등 관점에서의 이 같은 인식 변화가 바탕이 되었기에 이곳의 공공 보육 제도 등은 효과가 배가됐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순위는 이렇게 가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된 ‘외국인 가사도우미’ 법안이나 공공 보육 늘리기에 방점을 찍어 온 방향은 순서도 틀렸고,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남성 참여가 부족’한 문제를 온 마을(여성)을 동원해 아이를 키우는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고육지책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보나 주 양육자의 엄연한 한 축인 남성은 쏙 빠져있다. 그러더니 별안간 ‘아이 셋 군 면제’ 정책에서는 혜택을 받는 대상으로 남성이 전면에 등장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30세 전에 아이 3명을 ‘여성이’ 낳으면 ‘남성이’ 병역 의무를 면제받는 황당무계한 ‘아이디어’를 검토했다가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도구화’ 된 여성과 ‘페미니즘 없는 패밀리즘’의 모순

저출생 대책이랍시고 정치권(주로 남성 의원들)이 최근 내놓는 방안들이 다 이런 수준인 것은 개탄스럽다. 여전히 여성의 몸이 도구화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인데, 온통 남성의 입장과 시각으로 점철돼 있다 보니 자꾸 그렇게 된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인구가족부’로 개편하겠다 한 정권은 시작부터 ‘여성의 도구화’라는 그림자를 드리웠고, 우려대로 그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인구가족부로의 개편 방향성이나 이번에 나온 아이 셋 군 면제 정책에서 여성은 ’출산하는 몸’으로 도구화된다. 이들 정책에서 출산하지 않는 여성, 이성애나 결혼을 하지 않는 여성의 존재는 암묵적으로 지워진다.

그 와중에 꿋꿋이 외치는 K-패밀리즘(familism)은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다. 페미니즘적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가족의 지속가능성을 높인 북유럽 사회가 차라리 패밀리즘에 가깝다. 여성을 자유의지와 권리를 가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는 않으면서 아내(내조)·엄마(출산)·딸(감정노동 및 효도)로서의 역할만 기대하며 가족의 중요성을 부르짖는 것은 비인간적이며 모욕적이다.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거부하는 가장 핵심에 이 문제가 있다. 이를 개선하지 않는 한 무슨 수를 써도 아이 낳는 여성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외국인 가사도우미 법안은 어떨까.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가사근로자법 개정안은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최저임금 적용에서 배제시켜 월 100만원에 고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으로, 이주노동자의 ‘저가 돌봄노동’으로 국가소멸 위기를 해결하자는 발상에 인종차별과 노동 착취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더 문제인 것은 주로 여성이 도맡고 있는 돌봄노동의 저임금화를 고착화시키는 측면이다. 이때 여성은 ‘돌봄하는 몸’으로 도구화된다.

기존 조사에서 결혼을 꺼리는 이유로 가장 많이 지목된 것은 여성들의 경우 ‘가사노동 분담’, 남성들의 경우 ‘경제적 이유’였다. 그러니 양측의 고민을 모두 반영한 ‘저임금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들여오는 것은 딱 들어맞는 대책처럼 보였던 듯하다. 1순위 이유를 이렇게 해결해주면 출생률이 오르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순진함인지 단순함인지 모를 이런 도식적 사고는 현실과 유리된 채 설문조사로만 정책을 수립한 한계다. 이미 이 제도를 시행 중이라는 홍콩(0.76)과 싱가포르(1.04)의 합계출산율이 가사노동자가 드문 스웨덴(1.67)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데서도 힌트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하나의 현상적 답변을 골라야 하는 설문조사에서 남성과 여성이 각각 택한 선택지는 편의상, 명목상에 가깝다. 가사노동의 평등한 분담이 요원하고, 남성 가부장에게 경제력 압박이 과중한 것은 우리가 여전히 ‘사위와 며느리의 지위가 다르게 인식되는’ 사회를 살고 있어서다. 기계적으로 여성의 가사노동을 인건비가 더 싼 여성과 나누게 하고, 남성의 경제적 압박을 덜어준다고 개선될 문제였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다.

◆‘전통적 성역할’ 건들지 않는 정책은 무용지물

결혼·출생률 하락에 경제적 이유를 가장 앞세우는 것도 결국 남성의 입장에서 먼저 보는 습관 때문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남성이 가난해서’ 결혼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가정을 꾸릴 동반자로서 믿음이 간다면 ‘남성이 가난해도’ 기꺼이 함께 미래를 그려볼 텐데, 그조차 되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다소 추상적이니 설문조사 등에서는 “가사노동 걱정”을 명목상 이유로 들고 있다고 분석된다. 결국 총체적 난국인 상황을 남녀 공히 댈 만한 그럴듯한 핑계로 “가정 유지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며 번역해 표현하는 실정이다. (물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나, 이는 부수적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정말 해결하고 싶다면 지금과는 정반대의 방향성이 필요하다. 남성의 곁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여성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 도구화하지 않는 것이 첫번째다. 페미니즘 악마화를 멈추고, 가족 구성원이 동등한 위치에서 제몫을 다하며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로운 ‘페미니즘 품은 패밀리즘’이 정착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안타깝게도 이 사회가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를 일찌감치 깨달은 여성들은 비혼·비출산이라는 초강수 생존전략을 도모하기 시작했고, 일부 남성들은 모든 걸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며 시대에 발맞춘 변화보다는 현실 외면을 택했다. 그 간극이 점점 더 커져간다는 것이 앞으로 닥쳐올 진짜 문제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2018년에 이미 세계 주요국 가운데 한국은 결혼을 원하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 차이가 가장 큰 사회였다.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남녀의 응답이 대부분 국가에서는 대동소이했지만, 한국에서만 남성(61%)과 여성(29%)의 동의율이 두 배가량 차이났다. 한국은 남성이 결혼하고 싶어하는 비율은 여러 국가 중 가장 높은 편이지만, 여성이 결혼하고 싶다는 비율은 가장 낮은 편에 속했다.

이러한 성차를 어떻게 좁혀갈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다. 아이 셋 군 면제 정책도, 외국인 가사노동자 법안도 성 인지적 관점에서 근본적인 비판과 분석이 더 나왔어야 하는 이유다. “현실성이 떨어진다”거나 “부잣집 아들만 위한 정책”, “인종차별법 부활” 같은 지적이 주된 반박이었다는 건 그런 점에서 유감스럽다.

지금은 정공법이 가장 과감한 저출생 정책이다. 저런 수준의 편법과 변칙은 과감하다기보다 진부하며, 반발과 부작용만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가사·돌봄노동의 주체로 남성을 적극 올리고, 달라진 시대상에 맞는 변화를 요구하며 남성과 여성의 관점이 여기에 수렴하도록 독려하는 정석 대처만이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얼마나 더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단순히 남성에겐 경제적 부담을, 여성에겐 가사노동 부담을 줄여주는 방식은 전통적 성역할의 변화는커녕 고착화를 가속화하는 길임을 놓쳐서는 안된다. 오히려 남성은 가사노동에 더 참여하고, 여성은 경제활동에 더 참여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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