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음주운전 가해자가 양육비 책임" 한국판 벤틀리법, 정의로운 해법될까
요즘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법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벤틀리법'입니다.
음주운전 사망사고를 냈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 자녀의 양육비를 책임지도록 하는 법인데요.
올해 1월 미국 테네시주에서 처음 시행됐고, 20여 개 주 의회에서 법안 도입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 국회도 '벤틀리법'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관련 보고서를 냈고 민주당 그리고 국민의힘에서 이번 주 '한국판 벤틀리법'을 각각 발의했습니다.
앞으로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입법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텐데요. 여야 가리지 않고 법안을 발의한 만큼 법안 통과 전망도 나쁘지 않아보입니다.
음주운전 사고로 남겨진 두 손자…"행동에 따른 책임져야" 투사가 된 벤틀리 할머니
벤틀리법은 미국 테네시주에 살고 있는 6살짜리 소년 벤틀리의 할머니가 탄생시킨 법입니다.
지난해 4월, 고작 5살이던 벤틀리, 그리고 3살 메이슨은 음주운전 사고로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생후 4개월 된 남동생을 잃었습니다.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건 바로 벤틀리와 메이슨의 친할머니 세실리아 윌리엄스. 아들 부부와 갓 태어난 손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슬퍼할 새도 없이 그녀는 남겨진 두 손자들에게 부모의 사망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신이 너희들의 엄마와 아빠, 어린 동생을 먼저 데려갔다"고 말입니다. 그날로 그녀는 두 손자의 보호자가 됐습니다. 사고 이후 그녀는 미국 전역을 돌며 음주운전 사망사고 가해자가 피해자 자녀의 양육비를 책임지도록 하는 입법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바로 손자 이름을 딴 벤틀리법입니다.
최대 23세까지 양육비 지원…"안 주고 버티면 강제 집행"
그렇다면 양육비는 얼마나 줘야 할까요. 법원은 피해자 유자녀의 경제적·교육적 필요, 보호자의 경제적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양육비 액수를 결정하게 됩니다. 법원이 양육비를 산정해 선고하면 가해자는 법원 명령에 따라 법원에 납부해야 하는데요. 법원이 가해자로부터 받은 양육비를 유자녀의 보호자나 후견인에게 송금해주는 구조입니다. 또 만약 가해자가 수감된 경우에는 석방 후 일정 기간 안에 무조건 양육비 지급을 개시해야 하는데요. 연체금 지급 계획도 세워야 합니다. 미국 테네시주에서 통과된 벤틀리법은 석방 후 1년, 우리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석방 후 6개월 안에 지급을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도 가해자를 상대로 물질적,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소송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일이라 피해 유자녀에게는 과정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일 수 있습니다. 복잡한 민사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는 것보다 피해자 부담을 덜어주기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는 겁니다.
유가족 월 평균 소득은 절반으로 감소…음주운전 가해자 "직업·소득 변화 없어"
2019년부터 3년 동안 음주운전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한 해 평균 262명. 유가족,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 미치는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통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음주 사고를 포함한 전체 교통사고에서 피해자인 부모의 사망 당시 자녀 나이가 만 3살 미만인 경우가 24%, 3~6살까지는 36%에 달했습니다. 사고 후 가정의 월평균 소득은 절반 미만으로 줄었습니다. 자택 소유 비율은 낮아지고 임대주택 거주 비율은 높아졌는데요. 또 절반 이상의 유자녀가 부모의 사고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고 응답했습니다.
음주운전 가해자 경우는 어떨까요. 교통사고를 내고도 4명 중 3명은 직업에 변화가 없었고 60%는 소득도 그대로였습니다. 10명 중 1명은 오히려 소득이 늘었다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가해자들이 사고를 내고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동안, 피해 유자녀들은 정신적 고통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과도 싸워나가야 하는 겁니다.
'죗값 치렀다'는 가해자…유족의 몫이 된 부모의 빈자리
SBS와의 인터뷰 말미에 윌리엄스 씨는 사실 내일이 세상을 떠난 당신의 아들 코딜의 생일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32살이 됐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날의 사고 이후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그녀는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을 감당하기도 힘든데, 남겨진 아이들이 겪고 있는 슬픔까지 매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충분한지 매일 자문해보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며 "누구도 부모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가해자들은 사고 이후 형벌로 '죗값을 치렀다'며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이들에게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한 고민과 고군분투는 오롯이 피해 유족들의 몫이었습니다. 어떠한 배상이나 보상도 그들의 상처를 지울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우리 사회도 이들을 위한 '정의로운 해법'을 고민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하정연 기자h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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