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항복한 일본인 1만명이었다…"우리 조선!" 외쳤다[이기환의 Hi-story]

기자 2023. 3. 2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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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요. 2~3만명(일본측 자료)에서 10만~40만명(조선측 자료)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어땠을까요. 그 숫자가 1만명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597년(선조 30) 5월18일 도원수 권율(1537~1599)이 적진에 밀파된 첩자들의 보고를 정리해서 조정에 알렸는데요.

“왜군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항왜(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이미 1만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놓았을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근거린답니다.”(<선조실록>)

한 연구자가 <실록>에 등장하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를 집계했는데요. 모두 42건에 600명에 달합니다. 기록된 숫자만 이 정도이니, 갖가지 이유로 항복하거나 귀화한 왜인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록에는 일본 이름이 상당수 보입니다. 사야가,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의 이름이 보입니다.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임이 분명하죠.

사진은 ‘평양성탈환도’의 부분. 왜군들이 조·명연합군에 의해 쫒기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임진왜란 개전초기 전세는 왜군의 파죽지세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움켜쥔데다 명나라군까지 참전하자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 오랜 전쟁에 지친 왜군들은 설상가상으로 군량미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야가 김충선

가장 유명한 이는 사야가(沙也加·김충선)라 할 수 있습니다.

사야가, 즉 김충선의 문집인 <모하당집>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2)가 이끄는 왜군 2진의 선봉을 맡아 부산포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부하들과 함께 귀순했다”고 썼습니다. <모하당집>은 사야가가 출정 전부터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사야가를 가상하게 여겨 자헌대부(정 2품)를 제수했구요. 그러면서 김해 김씨의 성과 함께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답니다. 김충선의 본관은 임금이 하사한 성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하기도 하고, 집성촌(대구 달성군 우록리)의 이름을 따 ‘우록 김씨’라고도 합니다.

1592년 4월15일 벌어진 동래부전투를 그린 동래부순절도. 왜군은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며 승승장구했다.|육군박물관 소장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고, 조총과 화포, 화약제조법을 전수했답니다. 또 이괄의 난(1624)과 병자호란(1636) 때도 공을 세웠답니다. 심지어 훗날 정조 임금은 ‘김충선=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손’이라는 가짜뉴스를 철석같이 믿게 됩니다.

“왜인 김충선은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의 외손이다. 임진왜란 때 선봉에 서서 충성을 다했다. 김씨 성을 하사받고…호는 모하당이라 한다…사실이 맞는가.”(<승정원일기> 1797년 10월 17일)

근거없는 뉴스였죠. 김충선은 정조 임금마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손이라고 여길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겁니다.

<선조실록>에 항복했거나 귀순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자주 보인다.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항복 혹은 귀순한 일본인은 42건에 600명에 달한다는 연구가 있다.

■왜군의 항복을 적극 유도하라!

물론 사야가, 즉 김충선처럼 처음부터 귀순을 염두에 두고 참전한 왜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지지부진해진 전쟁에 염증을 느꼈구요. 자연 군량미도 부족해졌죠.

1594년(선조 27) 4월17일 접대도감 이덕형(1561~1613)의 언급이 의미심장합니다.

“왜적들의 한끼 식사가 작은 종지 하나의 밥이 전부인데, 그나마 절반이 껍질째였습니다. 일은 고달프고 배가 고파 항복하려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선조실록>)

울산왜성에 포위된 왜군이 물을 길러 나오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적진 내부의 갈등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일수록 귀순·투항자가 많았죠.

‘악귀’라는 악명을 떨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병졸들이 특히 그랬습니다. 예컨대 1597년(선조 30)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는데요.(4월21일) 귀순자들은 “사역이 과중하고 장수의 명령이 너무도 혹독하여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귀순자들은 특히 “요즘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군졸이 하루에 100명에 이른다”고 알렸습니다. 이런 항왜를 후대한 조선조정의 ‘항왜 정책’도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인 사야가는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부산진 상륙 후 곧바로 귀순했다.|서울대 규장작한국학연구원 자료

선조는 투항하는 왜적에게 첨지(정3품 무관), 동지(삼군부의 종2품) 등의 고위관직을 내렸죠.

반대가 만만치 않았는데요. 그러나 선조는 “항왜 가운데 검술을 할 줄 알거나 병기를 잘 만들거나 하는 자를 꾀어내면 파격적인 상을 내려야 한다”(1595년 6월11일)고 일축했구요. 심지어는 “지금 항왜들만이…성 위로 올라가 죽을 힘을 다해 적병을 죽인다…이들에게 모두 당상관(정3품 이상)의 직책을 내리고, 은(銀)을 상급으로 하사하라”(1597년 8월 17일)는 명을 내립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병들이 조·명 연합군에 항복하는 사례가 많았다.|일본 혼묘지(本妙寺) 소장

■‘우리 조선’이라 했던 일본인

선조의 말마따나 ‘제 몸 돌보지 않고 싸운 항왜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이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바로 여여문(呂汝文)입니다.

1595년(선조 28년) 6월19일 <선조실록>에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입니다.

“내가 항왜(降倭)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실행하고 있는가. 요사이 이 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보통 왜인이 아니다. 후하게 대우하라.”

여여문이 누구이기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을까요. 그럴만 했습니다. 여여문은 훈련도감에서 결성한 ‘아동대(兒童隊)’를 조련한 책임자였는데요. 검술을 익히게 하고 사수를 양성하게 했죠. 그런데 그 성과가 대단했습니다.

<선조실록>은 “(여여문이 훈련시킨) 아동대 인원 50여 명을 대상으로 치른 시험에서 합격자가 19명이나 되었다”(6월21일)고 칭찬합니다. 이뿐이 아니고 항왜 여여문은 일본군의 진법과 전술을 조선진영에 가르쳐 주었는데요.

항복한 왜군 가운데 여여문이라는 인물이 돋보인다. 여여문은 훈련도감에 설치한 ‘아동대’의 훈련을 맡아 아이들의 검술과 사격술을 가르쳤다. 선조는 여여문이 병들자 “차도가 있느냐. 극진하게 대접하라”는 특명까지 내린다.

특히 “왜군은 쳐들어올 때 반드시 소수의 군사로 유인하여 적이 매복한 곳에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잇따라 일어나 공격한다”고 일러주었는데요.(<선조실록> 1596년 2월17일) 이 왜군의 전법은 칠천량 해전(1597년 7월16일)에서 입증되었습니다.

이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법이 말려 12척의 전선만 남긴채 사실상 전멸했거든요. 만약 여여문이 가르쳐준 전법을 전투에서 써먹으면 전세가 바뀌었을 겁니다. 여여문은 전쟁터로 달려가 한목숨 바칠 각오가 있음을 피력하기도 했답니다.

“제가 현장으로 내려가서 산성을 다시 쌓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저를 요해처로 보내주십시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1597년 1월4일 <선조실록>)

여여문은 “후한 이익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유인하기는 쉽다”면서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도록 계획을 세우면 아마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습니다. 과감하게도 ‘적을 이용한 적장 모살 작전’을 아뢴 것이다. 여여문은 이때 조선을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음을 알 수 있죠.

항왜 여여문은 ‘우리(我) 조선’이라 일컬으며 “말만 앞세우고 실행하는 일이 적다”고 꼬집었다. 선조는 “여여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가 부끄럽다”고 했다.

■허무하게 죽은 항왜 여여문

“우리 조선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한갓 계획만 세우고 의논만 많지만 실행은 적습니다. 날짜만 기다린다면….”

병조판서 이덕형이 전해준 여여문의 말을 들은 선조는 “그의 말대로 하라”면서 “여여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여여문의 활약은 이어지는데요. 1597년(선조 31) 말 명나라군 총사령관인 양호(?~1629)가 여여문을 적진에 밀파하여 적정을 살피라는 임무를 맡깁니다. 적진에 잠입한 여여문은 울산, 즉 성황당·도산·태화강 등 3곳의 적병숫자를 파악해서 손수 형세도를 그린 뒤 빠져나왔는데요. 여여문의 형세도를 본 명나라군 양호 총사령관은 은 10냥을 내려주었구요.

여여문은 울산상 전투에서 적진에 침투하여 형세도를 그려 바친 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인 파귀가 여여문을 죽이고 여여문이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을 모두 빼앗았다.

명나라군은 여여문의 형세도 대로 작전을 짰구요. 명나라군의 마귀 제독(생몰년 미상)이 군사를 일으키자 여여문을 다시 적진에 침투시켰습니다. 이때 여여문은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나왔는데요. 여기서 비극이 일어납니다.

명군 소속 장수(유격)인 파귀가 여여문을 죽이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마저 다 빼앗은 겁니다.

<선조실록>은 1598년(선조 31) 3월 27일 여여문의 죽음을 알리면서 “여여문이 베어낸 왜적 4명의 수급을 파귀가 빼앗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들이 많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파귀가 여여문의 공을 가로챈 혐의가 짙습니다. ‘우리 조선’이라고 하면서 충성을 다한 항왜 여여문의 허무한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1598년(선조 31) 5월 17일 우의정 이덕형은 “여여문은 임진란 이후로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처자식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면서 “여여문을 논상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여여문이 억울하게 죽자 우의정 이덕형은 “여여문은 물론 처자식까지 모두 조선을 위해 죽었다”면서 “그에게 상급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한다.

■김해부사를 부둥켜안고 통곡한 일본인

사백구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7년 9월8일자를 볼까요.

경상우병사 김응서(1564~1624)가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면서 올린 상소문인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백구는 1597년 3월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투항한 왜인인데, 일단 김해부사 백사림의 휘하로 보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왜군이 황석산성(함양)을 공격했구요. 이때 백사림을 따라 출전한 사백구가 조총으로 왜병 4명을 죽였답니다. 그러나 산성은 함락되었고, 뚱뚱했던 백사림은 꼼짝없이 포로가 될 운명이었답니다.

항왜 사백구는 황석산성 전투에서 김해부사 백사림을 구한 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져와 백사림에게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때 사백구가 성을 지키던 왜병들을 위협하여 백사림을 성밖으로 탈출시켰는데요. 사백구는 백사림을 산속에 숨겨놓고는 왜병이 점령한 산성으로 다시 들어가 쌀 한말과 간장, 무우, 옷가지 등을 구해왔구요. 그 사이 백사림은 사백구가 배신한 줄 알고 몸을 숨겼는데요. 사백구는 백사림이 보이지 않자 ‘어디 갔느냐’고 애타게 불러댔구요.

사백구는 겨우 찾아낸 백사림의 허리를 끌어안고 “대체 어디 갔다 왔냐”고 반가워했답니다. 백사림 가족은 사백구 덕분에 목숨을 건졌구요. 사백구는 백사림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사백구와 백사림의 일화를 전하던 김응서의 한탄이 심금을 울립니다.

“조선의 유식한 무리도 처자식을 구제하지 못하는데, 사백구 같은 오랑캐가 지극정성으로 김해부사를 피신시켰습니다.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선조실록>)

항왜 ‘준사’는 명량해전에서 바다에 빠진 왜군장수 ‘마다시’를 지목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그 수급을 베어 내다 걸어 왜적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명량대첩의 당당한 조연인 항왜 ‘준사‘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1597년 9월16일)에서 한몫 단단히 한 항왜 ‘준사’도 유명하죠.

1593년 안골포에서 투항한 준사는 이순신(1545~1598) 장군이 단 13척이 배로 일본 수군을 격파할 때 장군의 배에 타고 있었죠.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들을 내려다 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지목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마다시의 목을 내다걸어 왜적의 사기를 꺾었구요. 준사가 지목한 마다시는 왜장인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1561~1597)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항왜 주질지와 학사이는 경상 우병사 고언백을 찾아와 “우린 이미 일본을 등졌으니 조선사람이며 조선을 위해 죽어야 한다”면서 적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일 모책을 밝혔다.

■“아깝다! 가토 기요마사 암살계획….”

적장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계획을 모의한 ‘항왜’도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5년 2월29일자에 나와있는데요.

경상좌병사 고언백(?~1608)에게 ‘항왜’ 주질지와 학사이가 쫓아왔습니다. 두사람이 은밀하게 고한 내용은 놀라웠습니다.

“우린 본국(일본)을 등졌으니 이미 조선시람입니다. 마땅히 적의 괴수(가토 기요마사)를 베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암살계획은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청정(가토)은 다른 장수와 만날 때 거느리는 군사가 10여인에 불과합니다…사냥은 단기필마로 합니다. 이때 일본인 중 내응하고 있는 자와 살해를 도모한다면 손바닥 뒤집듯 쉬울 것입니다.”

고언백이 이들의 말을 믿지 않자 더욱 치밀한 계획까지 일러주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항복한 구질기의 사촌형(고로비)이 청정(가토)의 가장 가까운 군관으로 있습니다. 고로비 또한 조선 진영으로 귀순하려 합니다. 그 사람과 내응하면 성사될 겁니다.”

하지만 이 암살계획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와 왜와의 강화 계획이 틀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고언백은 왜군진영의 내응자인 고로비에게 “강화교섭을 위해 명나라 사신이 내려올 것이니 (가토의 암살계획은) 없었던 일로 하라”는 밀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적진에 있던 고로비는 “일본이 명나라와 강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크게 화를 냈습니다.

고언백은 혹여 고로비가 경거망동하여 가토 기요마사 암살계획을 실행할까봐 전전긍긍 했습니다. 화해분위기를 망칠까봐 두려워 한 겁니다.(<선조실록> 1595년 3월24일)

항왜들의 활약이 임진왜란 내내 대단했다. 1597년 11월 권율 도원수는 1597년 벌어진 정진전투에서 활약한 항왜들의 전공을 일일이 얼거하고 있다.

■1만명의 항왜는 어디 있을까

참 대단한 분들이죠. 이뿐이 아니죠. 1597년(선조 30) 11월 벌어진 정진 전투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이 컸습니다. 아군이 왜군의 포위에 말렸지만 항왜의 맹활약으로 사지를 겨우 탈출했는데요. 권율 도원수는 이 전투에 참전한 항왜들의 이름과 벼슬명, 공적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왜적 70명을 죽였습니다. 검첨지(정3품 무관) 사고여무는 왜적의 목을 두 급, 동지(종 2품) 요질기와 첨지 사야가(훗날 김충선)와 염지는 각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항왜 손시로는 탄환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항왜 연시로는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왜기와 창, 칼, 조총 등을 노획했고, 우리나라 포로 100여명을 빼앗았습니다.”

이밖에도 1597년(선조 30) 남원성 전투와 상주 전투, 가덕도 전투, 그리고 1598년(선조 31) 10월 사천 전투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상이 보입니다. 항왜들은 전투나 적정탐지 외에도 등에서 기술전수에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요.

조선은 그들에게서 총검을 주조하고 염초를 굽는 방법을 배웠구요. 조총의 사격술과 검술도 익혔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1597년(선조 30) 1월 “김응서 휘하의 항왜 중 조총 기술자가 많으니 상경시켜 배우자”는 건의에 선조는 자신있게 밝힙니다.

“이제 조선에도 조총을 잘 만드는 자가 많다. 상경시킬 필요가 없다.”

항왜 가운데는 김충선 뿐 아니라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처럼 조선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이라 하며 충성을 바치고자 했던 여여문은 너무나도 허무한 죽음을 당했죠.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여여문이나 사백구 같은 이들은 실록에 이름자를 남긴 분들이죠. 나머지 1만명에 달한다는 항왜들의 자취는 찾을 수 없네요. 그들 역시 조선인으로서 뼈를 묻고 살면서 후손을 남겼을 겁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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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시 향화·수직 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항왜의 유치와 활용’, <역사와 세계> 제32권, 효원사학회, 2007

이장희, ‘임란시 투항왜병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제6권 6호, 한국사학회, 1971

허준, ‘임진왜란과 민족 구성원의 확대-왜란기 항왜를 중심으로’, <지역과 역사> 49권 49호, 2021

김선기, ‘항왜 사야가(김충선)의 실존인물로서의 의미와 평가’, <일어일문학> 43권 43호, 대한일어일문학회, 2009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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